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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가람 Jan 14. 2022

기분도 꿀꿀한데 와인이나 마셔볼까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겠다. 나는 우유니에 있었으니까."


 꿈에 그리던 우유니 사막을 밟고 저런 다짐을 했었다.


 세계일주를 다녀온 경험으로 책을 출간했다. 공부하길 원했던 대학원에서 학업도 이어갔다. 라인이 잘 그려진 길을 따라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기분.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몸에서 힘들다는 신호를 보냈으나 뭐 이런 것쯤이야. 건강에 대해서 염려하기보다는 과신하는 편이었고, 육체적 건강은 정신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도 강했다. 자신만만했다.


 졸업을 앞둔 해, 공부를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어릴 때 수술했던 곳은 당연하고 다른 곳들도 아우성을 쳐 대서 스스로 화장실조차 못 갈 지경이었다. 공부는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몇 달 아픈 것쯤이야. 그러나 2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다시 책을 잡을 엄두가 안 난다.

 수시로 달라지는 컨디션 때문에 나의 탈출구였던 여행도 접었다. '자꾸만 시들어 다면 지금이 바로 여행이 필요한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책을 출간하고 정작 내가 여행을  가다니. 설상가상으로 코로나까지 겹치니 히키코모리가 따로 없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후진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맴돈다.


  죽을병도 아닌데 고치지 못하는 의사가 밉더니, 부실한 유전자를 준 것 같아 엄마아빠가 원망스러워진다. 먼저 자리 잡은 친구들이 부럽더니, 이제는 건강한 사람들이 부러웠다.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내 품에서 언제나 반짝이던 '우유니에서의 다짐'이 금 간 것일까. 때로는 모두가 미웠고 모두가 부러웠다.



 그럴 땐 와인을 마셨다.


 여행에서 가장 힘든 일은 국경을 넘는 일이었다. 짐을 싸고, 환전을 하고, 출국심사를 하고, 입국심사를 하며 육로로, 배로, 비행기로 국경을 넘어 도착한 다른 나라의 첫 도시.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숙소에 도착하면 언제나 노을이 지려고 하는 이른 저녁이었다.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하우스 와인을 한 잔 주문하는 것으로 셀프 환영식을 열었다. 더러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아도 괜찮았다. 와인과 마시면 부족한 감칠맛도 더해주거나 입에 맞지 않는 향신료도 부드럽게 만들어주니까. 10유로도 되지 않는 음식이지만 미슐랭 코스요리가 따로 없다. 불콰해진 얼굴로 배 부르게 나오면 마음마저 든든했다. 그때 와인이 주는 만족감과 위로를 환기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집에서 마시는 와인은 더럽게 맛이 없었다.


 제철 회와 먹기 위해 샀던 화이트 와인은 식초처럼 시큼한 맛만 입안에서 튄다. 투뿔 소고기에 먹는 레드와인은 김 빠진 콜라처럼 맹숭맹숭하다. 여행할 때 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썼는데, 역시 추억은 모든 것을 미화시키는구나, 실망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반 병만 마시고 남겨 두었던 와인을 꺼냈다. 안주는 크래커 하나. 머그컵에 대충 따라 마시는데 향부터 남다르다. 이상하다, 어제는 열자마자 알코올 향이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깊어졌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달라진 것은 안주와 오픈한 시간일 뿐이다. 전날 끓여놓은 김치찌개처럼 와인을 마시는 환경의 차이가 맛을 변화시켰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브리딩, 스월링, 빈티지 등등 친절하게 알려주는 블로그가 많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럽다. 과일향이 나는 것 같기도. 비싼 안주 대신 알함브라의 야경을 안주삼아 와인 한 잔 마시던 그라나다가 떠오른다. 갑자기 와인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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