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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Feb 06. 2022

한남동의 신데렐라

막차 시간이 야속해서 집에 안 갔다

하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았던 새내기 시절. 인싸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술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인싸가 되겠다는 꿈도 술자리도 허망한 구석이 있지만 그때는 진심이었.


의외의 복병은 외박을 막는 부모님도 아니고, 술을 못 먹는 체질도 아닌 막차 시간이었다. 학교가 있던 한남역에서 안산 고잔역까지, 또 고잔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집까지 무사히 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용을 써봐도 10시 10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10시면 대부분의 사람이 너무 취하지도 안 취하지도 않은, 분위기가 가장 무르익을 시간이다. 데면데면하던 사람과도 속 이야기를 터놓을 만큼 가까워지는 그 시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다니. 열두 시까지 막차가 있다며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서울 사는 선후배 동기들이 세상 부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함께 하던 사람들은 아쉽다고, 어딜 가느냐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무 의미 없다. 그들은 나와 함께 밤을 새워줄 것도 아니고, 택시비를 내줄 것도 아니고, 적당히 놀다가 집에 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들의 가지 말라는  한마디가 마음에 돌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조금  시간을 보낸다면 평생 절친이  인연들을  지나쳐버리는  같이 자꾸만 아쉬웠다.


그래서 집에  갔다. 1학년 1학기에 학교에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핑계로 얼마나 외박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나만큼 외박을 많이 하고 학교에서 밤을 새운 동기 여자애는  두어  정도였다. 그렇게 특정을   있을 만큼 대부분은 당연히 집에 갔는데 나랑 몇몇 아이들만 꿋꿋이 밤을 새웠다. 그렇게 자주 많은 밤을 보냈으면  애들과 절친이  만도 했는데 학교 때도  친하지 않았고, 학교 이후로는 연락 두절이다. 외박이 찐한 인연을 맺어주지 않는다는 증거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1학기가  지나기도 전에 인사하기도 어색한 사이가 됐다.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으며 이유를 생각해봤다. 4월의 병이라고 그랬나,  시기를 꼬집어 부르는 용어도 있었다. 집에도  가고 밤을 새워가며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던 새내기가 술자리의 덧없음을 느끼고, 의욕만으로 모두와 친해질  없다는  달으며 차츰 울타리를 치는 시기. 그렇게   남짓한 시간만에 06학번 사이에, 선배와 후배 사이에 자연스럽게 무리가 구성됐다.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자 막차 시간이 오히려 더 야속해졌다. 1분이라도 더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용산행 경의 중앙선을 타고 이촌역에서 오이도행 4호선으로 갈아탈 때는 늘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범계역에 살던 내 친구 A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매우 엄하셔서 A는 절대 외박을 하지 못하고 늘 막차를 타고 집에 가야만 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밖에서 밤을 새워보고 싶었던 그를 위해 나는 물론 당시 과대 언니까지 동원해 부모님과 돌아가며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작전은 무참히 실패했다. 스무 살 딸의 외박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부모님의 신념은 투철했다. 어느 밤에는 연락이 두절된 딸을 찾아 새벽에 한남동까지 무작정 찾아오셨던 분들이다. 누구와 어디에 있는지 말만 하면 마땅치는 않아도 외박을 허락했던 우리 집과는 달리 A네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성과 같았다. 스무 살 애들의 패기는 그보다도 더 강력해서 범계역 막차 시간만 겨우 맞춰 A와 4호선을 함께 타고 온 내가 그 무서운 부모님이 계신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나도 참, 집에 좀 가지...


집에 가지 않고 거리를 서성이던 시간, 과자 쪼가리에 소주와 맥주를 들이부으며 나눈  의미도 없는 이야기들, 언제 어느새 서로를 향해 던졌는지 모를 하트 시그널이 난무하던  시간. 너무 이른 막차 때문에 놓쳤을, 너무 이른 막차 때문에 무한히 연장된  시간들이 아련하다. 새벽 3~4시에도 번화하던 한남오거리의 풍경과 그리스 노래방을 나온 후에도 첫차 시간이 한참 남아서  이상 다음 술자리를 책임질  없어 어딘가로 사라진 고학번(그래 봐야 그들도 스물여섯이었다니) 몇몇의 얼굴이 떠오른다.  곳이 없어 다시 신관 2 과방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면서도 피곤한  모르고 신났던 2006년의 . 앞날은 흐리멍덩하지만 무엇이든 꿈꿀  있어 좋았던 조무래기 시절이 가끔은 그리워진다.




Photo by matthaeu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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