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삶 만드는 삶 8
답사자료집, 광주민중항쟁 자료집 (전2권)
대학 때는 자료집 홍수였다. 만들 때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전과 다른 자료집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곤 했다. 이 자료집들이 나 말고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지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들은 편집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각종 오해가 난무한다. 글을 쓴다거나 책 표지 디자인, 인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편집자 가운데는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들도 많고,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있으며 기계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인쇄물에 대한 식견을 갖춘 사람도 많다. 이런 감각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 일하는 데 도움이 되고, 오래 일하다 보면 이런 능력이 두루 생기기도 한다.
이런 오해가 답답해 국내외 훌륭한 편집자 선배들이 자부심과 긍지를 담아 편집에 대해 책도 여러 권 냈지만 편집자끼리만 열심히 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이 일을 나는 어쩌다 하게 되었을까? 한 사람의 직업은 재능과 취향, 노력 혹은 열정의 필연적 귀결이라기보다 그저 우연이 몇 번 겹쳐 빚어진 결과인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편집자가 무엇인지 모른 채로 막연히 비슷한 일을 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고등학교 교지 편집부였다. 문예반에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맡은 것이지만 이번 호 주제를 뭘로 할까(당시 교복 부활이 중요한 이슈여서 교복을 주제로 삼았다), 누구에게 무슨 글을 청탁할까(우리 아빠도 글을 한 편 썼다)를 의논하는 정도였는데, 제일 감격스러운 것은 그 모든 것이 책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된다는 것이었다.
대학 때는 숱한 자료집을 신나서 만들었다. 대학 때는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할 게 뭐가 그렇게 많았는지 여기저기서 자료집을 엄청나게 만들어 댔다. 그런 걸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료가 되는 많은 책들을 읽으며 내가 좋아하고 감동 받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워드프로세서가 막 나오고 286 컴퓨터가 드물게 보급되던 때였으니 자료집의 기교 따위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첫 시작은 답사자료집이었다. 사학과에서는 봄 가을 학기 중에 답사하며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핑계고 놀기 좋은 계절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친구들과 놀러 다닌다). 내가 사학과에 잘 왔다고 생각한 이유 중에 하나다. 그런데, 첫 답사 때 자료집을 받았다. 우리가 가는 지역의 역사, 사적 및 유적·유물에 대한 미술사적 설명이 담겨 있었다. 새로운 것이면 다 재미있었던 신입생은 답사 기간 내내 답사자료집을 끼고 살면서 이 설명은 왜 더 자세하게 쓰지 않았나, 여기의 이 유적과 저 유적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궁금해 했다.
하지만 자료집은 대학원생 선배들이 만드는 것이라 직접 물어보기가 어려웠다. 답사는 학부생들이 가는데 왜 자료집은 대학원생 선배들이 만들까. 학부생들로 답사반을 꾸리자는 당돌한 계획을 세웠다. 학부생의 눈높이로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과 궁금해 하는 것을 자료집에 담고 싶었다. 선배들은 귀찮은 일(?)이어서였는지 별말 없이 격려해 줬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들이었다.
‘미술사’가 뭔지, 그 말 자체도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들었으니 공부가 필요했다. 대학원 선배들에게 한국 미술사의 기초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책들을 요청했다. 마음 맞는 몇 명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여름 방학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사학과 대학원 선배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면서 답사 준비도 했다. 다음 답사지를 정하고 가봐야 하는 사적지는 어디고, 유적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 가운데 뭘 볼 것인지 매번 싸우듯이 토론했다. 사전 답사를 다니며 동선을 짜고 자료집에 넣을 사진도 찍었다.
사전 답사를 다니면서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았다. 내게 원형적 미감이 있다면, 아마 이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부석사 앞 사과 과수원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팔던 작고 빨간 홍옥, 눈이 쏟아져서 흰 점을 가득 찍은 풍경화 같았던 어느 사찰 앞 숲길, 무량수전 앞에서 본 다른 농도와 채도로 겹을 이루던 산들, 바람 따라 일렁이던 끝도 없는 호남 평원의 푸른 벼, 덩그마니 기단석만 남아 있던 폐사지의 고요,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시골 정류장에서 친구들과 바라본 노을, 정갈하게 빗질한 절 마당에 쏟아지던 햇빛과 그 위에 드리운 늦여름 배롱나무 꽃 그림자. 그건 사진으로는 찍을 수 없어 마음에 담았다.
이 모든 것이 답사자료집에 들어갔다. 컴퓨터 한글프로그램으로 만든 문서를 프린트하고 복사해서 학교 앞 제본소에서 자료집을 받았을 때 따뜻한 감촉과 옅은 휘발유 냄새, 그게 그렇게 좋았다. 책이라기에는 어딘지 허술했지만 내 손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 본 첫 책이었다. 답사자료집뿐만이 아니었다. 학생회에서 만드는 온갖 자료집을 도맡아 만들면서 만들 때마다 전과는 다른 자료집을 만들겠다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포부를 혼자 품었다.
광주민중항쟁 자료집에는 광주항쟁을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는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지만 그 외에도 광주민중항쟁 당시 거리에 뿌려졌던 전단의 내용, 광주 관련 시와 노래, 함께 생각해 볼 이야기, 광주나 그 근처에 살았던 선·후배들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 등을 담았다. 내가 했던 나름 파격적인 시도는 소설 수록이었다. 중대한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겪은 개인에게 남기는 영향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싣자는 내 생각을 친구들은 낯설어했다. 그럴수록 사명감에 불타서 의견 충돌까지 불사했다.
소설 수록이 결정된 후에는 누구 소설로 할 것이냐로 다시 시끄러웠다. 나는 광주항쟁 이후 사람들이 겪는 트라우마를 따뜻하고 아름답게 그린 소설가 임철우의 작품을 주장했고 친구는 광주항쟁 자체를 다룬 정도상의 소설을 밀었다. 결국 임철우의 소설을 실었는데, 그 소설 속의 한 이미지는 광주항쟁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른다. 도청 앞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이 검은 아스팔트에서 몸에 자목련 꽃잎을 붙인 채 하나 둘씩 일어나는 유령 같은 검은 실루엣. 흰 목련이 지고 자목련이 피는 늦봄이면 언제나 생각났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개인은 사건 속에 묻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는 늘 그 사라진 개인이 궁금했다. 그는 어떻게 됐을까? 그 사건에 주동자는 그렇게 큰 사건을 계획하면서 갈등은 없었을까? 죽음을 맞을 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건 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남은 생애 그 사건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문학은 그럴 때 유용했다. 자료집 말고 답사를 준비할 때도 그런 이야기들이 전해졌으면 싶었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짧은 극을 쓰거나 민속 연희를 우리 식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극은 모인 사람들에게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호응을 쉽게 이끌어 냈지만 여전히 나는 자료집이 좋았다. 한 학기만 지나도 예전 자료집은 모자라고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내용도 어설프고 나름 고심했던 실험도 치기가 넘쳐서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음엔 더 잘해야지, 마음먹었는데, 그런 순간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된 것 같아 스스로 뿌듯했다. 자료집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창피할 일도 없겠지만 더 잘 해보겠다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기록이 있어서, 책이 있어서 수만 년 동안 인류가 조금이라도 진보했을 거라고 믿는다. 편집자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지 않았을까. 기나긴 역사에서 개인의 임무는 오로지 다음 세대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모두 사라진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책이 아니라면 그 허무를 어찌 했을까. 다시는 이 이야기를 하지 못할 거 같아, 쑥스럽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 하련다. 나는 태어나서 책을 읽고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것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