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김현 선생님이 쓰신 프랑스 현대 비평이론서는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고 글씨가 작아 보기도 힘들지만 ‘김현’이라는 이름이 찍힌 인지 때문에 애틋해서 정리하지 못한다. 지금은 표지가 근엄하게 바뀌었지만 『행복한 책읽기』 초쇄는 노란 표지에 자제분이 직접 그린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1992년에 산 책을 잃어 버린 줄 알고 2003년에 다시 샀는데, 뒤늦게 찾아 두 권이 되었다
40년 넘게 살았다고 아무리 멋져보여도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냉소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다. 도리어 그런 자신을 어른이 되었다고 기특해했다. 그런데 어떤 글을 읽으면 마음이 뜨끔해져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좋은 평론가들이 쓴 글들이 그렇다. 그들은 영화든 책이든 TV 프로그램이든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 같은 외마디 말로 이해했다고 넘겨 버린 많은 것들을 정색하고 다시 보게 한다. 거기서 거기인 지질한 삶 속에도 빛나는 것들이 있다고, 다시 한 번 잘 보라고 다정하게 말해 준다.
돌아가신 김현 선생이 내겐 그런 사람이다. 그분은 프랑스 현대문학 비평이론에 대해 주로 썼는데, 소설도 아니고 비평이론까지 내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김현이 썼거나 번역했다, 혹은 추천했다는 이유로 읽었다. 푸코 연구서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다룬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나남), 20세기 프랑스 비평사의 주요 논문을 엮은 『현대 비평의 혁명』(기린원), 그의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들이 모두 그렇다.
이 책들을 다 이해하면서 읽은 건 아니다. 더러 읽다가 포기하기도 했다. 지금 펼쳐 보면 이 깨알 같은 글씨가 보이기는 했나 싶다. 역시 청춘은 시력인가! 다시 읽을 엄두조차 안 나는 이 책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건 순전히 ‘인지’ 때문이다. 책에 인지를 붙이던 시절이라 이 책들에는 ‘김현’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인지가 붙어 있다. 사모님이나 출판사 직원이 찍었을지도 모르는데, 선생님의 손길이 닿았겠거니 싶어서 버릴 수가 없다. (흠, 좀 변태 같은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끼는 책은 1992년에 펴낸 마지막 저작 『행복한 책읽기』(문학과지성사)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1990년에 돌아가셨으니 내가 그 분을 실제로 뵐 수 있었던 기회는 없었다. 마지막 책이면서 가장 사적인 이 책이 각별한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다른 비평이론서들보다 읽기도, 이해하기도 쉬웠다. 일기에서조차 읽고 평하기를 거듭했던 그의 태도는 각 잡은 다른 비평서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비평에는 아름다움과 진실에 대한 추구, 철저한 앎에 대한 지향, 성실함, 창작자에 대한 열등감 없는 천진함, 무엇보다 저자와 작품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는 혼잣말이었을 일기를 쓰면서도 작품과 그 작품을 쓴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읽고 좋다거나 재미있다거나 읽을 만하다는 평을 하면 무조건 찾아 읽었다. 그를 통해 시인 송찬호를 알게 됐고 소설가 최인훈의 산문을 읽게 됐다.
시인 김지하를 투사보다 시인으로 더 기억하는 건 김현이 쓴 그의 시 ‘무화과’에 대한 평문 때문이었다. 시인 기형도를 발견하고, 죽음을 맞닥뜨린 것도 이 책에서였다. 1988년 3월 29일자 일기에는 『문예중앙』 봄호에 실린 기형도의 「죽은 구름」과 「추억에 대한 경멸」에 대한 단평을 적었다. 그런데, 이듬해 3월 7일 일기에는 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유고라고 생각해선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유난히 눈에 띈다.
1989년 6월 4일 일기에는 보현봉 바로 아래 기도원에 가지런히 비질된 마당의 깨끗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죽음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적었다. 바로 뒷 일기가 죽은 기형도의 지인들과 술 마신 이야기인 것은 물론 우연이겠지만 그 일기는 이렇게 끝맺는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고. 병환으로 죽기 한 해 전이었으니 우연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썼을지도 모르겠다.
김현 선생에게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일화들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신비감을 더했다. 그는 겨우 나이 스물 셋이었던 1962년 『자유문학』에 「나르시스의 시론」을 발표하며 등단했는데, 당시 그를 발탁한 것이 양주동 박사였다고 한다. 전례대로 자신을 알아봐 준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때마침 외출하신 사모님과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대문 안으로는 들어왔는데, 집안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양주동 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당의 연탄 창고에 들어가 좌정하고 앉더니 제자들의 절을 받았다. 그런데, 절을 받고 나서 처음 한 말이 “자네는 자네가 천재인 줄 알겠지만 천재는 바로 날세” 했다던 일화. 그 일화를 전해 듣고 나는 1960년대 초의 서울대 인문대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상상하곤 했다. 4·19 혁명의 성취와 5·16 군사 쿠데타라는 반동을 연이어 겪은 이청준과 김승옥, 김현과 김치수, 염무웅, 김지하가 시와 소설, 비평을 논하는 풍경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그까짓 게 뭐,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도 김현 선생이 말했다시피 문학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권력도 돈도 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는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문학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발견하게 해 주었다. 나는 그가 권한 책을 읽으며 나 혼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삶의 빛을 발견하곤 했다. 사람들은 이제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낙담이 된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지, 사는 게 그렇지, 인간이 뭐 그렇지 하는 냉소가 피어오를 때, 사람들이 삶과 세상에서 좋고 밝은 무언가를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을 만들자는 의지가 더 힘차게 솟아오른다. 그럴 때면, 죽음을 앞두고도 읽고 쓰기를 거듭한 김현 선생이, 그의 책이 내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고 있구나 싶다. (아, 이것도 변태 같은가?)
그 손길을 느끼면 1987년 6월 22일 일기 속 사과 세 알을 나도 그 분께 건네고 싶어진다. “아빠, 저번 토요일, 아빠하고 엄마하고 전주 간 날, 박남철이라는 사람이 사과 세 알을 들고 찾아왔더랬어요. 그냥 가려고 그러더니,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 너희들 먹지 말고 선생님 꼭 드시라고 해라라고 말하고 가데요 ……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를 쓴 것이라며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 전화하던 박남철의 기행이, 문득 아이의 말로 희화화하여 들릴 때, 내 가슴은 이상하게 차분해지고, 그가 견딜 수 없이 안쓰러워진다. 가슴속 타는 불길로 자기와 세계를 파괴하기 직전에까지 이른 파괴의 시를 쓰는 시인. 과격하고, 극단으로 가라고 자꾸 충동질하면서, 실제로 그곳으로 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안쓰럽고 겁난다. 김현이, 이, 개새끼! 대갈통을 까부숴 버릴까 보다. ……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시를 계속 잘 쓰겠습니다. …… 그래 그래.” 내게도 이렇게 고개를 끄덕거려 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