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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 Nov 29. 2016

셜록 홈즈

읽는 삶, 만드는 삶 2

“삶은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무한히 기이하다.”

_아서 코난 도일 「신랑의 정체」, 『셜록 홈스의 모험』    


출판계에서는 명탐정 홈즈 시리즈를 읽고 책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코난 도일을 읽은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코난 도일을 읽는 밤』은 서평가 마이클 더다의 작품이고, 셜록 홈즈의 모든 것을 꼼꼼히 연구한 『셜록 홈즈의 세계』의 저자 마틴 피도는 옥스퍼드판 셜록 홈즈 시리즈 편집자의 제자다. 전형적인 홈즈 풍의 탐정소설로 홈즈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은 책들은 『점성술 살인사건』 외에도 많다.


셜록 홈즈 때문에 편집자가 되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셜록 홈즈가 편집자가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쓰면 대충 맞는 말이다. 홈즈 덕분에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덕에 하게 된 여러 가지 경험 때문에 결국 편집자가 되었으니까. 출판 동네에서는 유난히 셜록 홈즈를 읽고 책의 재미를 알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책과 함께 붙어 다니며 재미와 혼동되는 ‘유익함’ 말고 진짜‘재미’ 말이다. 읽는 동안 눈을 뗄 수 없고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며 어서 끝을 보고 싶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미루며 안달하게 되는 그런 것.

『워싱턴 포스트』 지에서 30년 넘게 서평 기자를 하고 있는 마이클 더다는 셜록 홈즈를 ‘덕질’하다가 『코난 도일을 읽는 밤』(을유문화사)이라는 책까지 썼는데, 거기에는 ‘베이커 가 특공대’의 창립자 크리스토퍼 몰리의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몰리가 볼티모어의 이넉 프랫 무료 도서관에서 셜록 홈즈 책을 빌려 집까지 가는 동안 딱 한 문단씩만 더 읽기 위해 가로등이 보일 때마다 멈춰 섰다고. 이 대목을 읽었을 때, 학교 도서실에서 해가 질 때까지 교사 앞 벚나무가 드리우는 그림자를 피해 책상을 옮겨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책을 처음 본 건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가던 어느 날, 섬 학교 도서실에서였다. 어쩌다 도서실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다가 그 책을 찾게 되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노란색 테두리에 표지 그림이 이국적인 계림문고판 ‘명탐정 호움즈’ 시리즈는 또렷하게 생각난다. 책을 집에 가져간 기억은 없으니 빌릴 수는 없었나 보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담당 선생님도 없이 방치된 도서실에 틀어박히곤 했다. 그 여름이 끝나고 중학교에 진학하려고 뭍으로 전학을 갔으니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때 읽은 홈즈 책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바스커빌 가문의 개』였다. 황량한 다트무어 평원의 을씨년스러운 밤, 바스커빌 가문의 후손 찰스 경이 불가사의한 죽음을 맞는다. 외부에서 공격당한 흔적이 없는 이상한 죽음이었다. 죽음의 원인을 밝히려 주변을 살피다 발견한 것은 그가 쓰러진 곳 몇 발자국 앞에 남은 커다란 개의 발자국. 사람들은 개의 발자국 이야기만으로 공포에 질렸다. 선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때문이었다. 잔인하고 사악했던 조상 휴고가 동네 처녀를 납치했다가 지옥에서 온 개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이 가문의 수치면서 원죄이고 또한 경고였다.

그 후 바스커빌 가문 사람들은 친인척이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거나 사고사를 당하면 조상의 악덕이 가져온 저주라고 굳게 믿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몸을 삼가며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찰스 경은 그 오랜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개를 보았다는 믿음만으로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찰스 경의 주치의이자 유언 집행인이었던 모티머 박사는 죽기 전까지 불안에 떨던 찰스 경을 생각하며 새로 올 가문의 후계자 헨리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가 홈즈에게 이 이상한 죽음을 해결해 달라고 찾아온 이유다.

기괴한 전설, 자기 암시로 죽은 사람, 실체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데 홈즈가 이 문제들에 엮여 있는 논리의 고리들을 하나씩 풀어 가며 마침내 사건을 해결한다. “그래서 범인은……” 하고 범인을 지목하면서 끝나는 탐정 소설의 통쾌함은 불의가 처벌되고 정의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이상한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데서 왔다. 나를 매혹한 것은 설명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믿음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명쾌하게 해결된 사건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은 건 잡을 수 없었던 범인들에 관한 이야기였다.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단편은 홈즈가 모든 문제를 해결했지만 범인은 이미 배를 타고 유유히 떠나 버린 뒤였다.그 후 그가 탔다는 배가 난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배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 조각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지인의 말이 유언비어처럼 붙은 채 끝난 이야기는 결국 벌을 받았군, 역시 세상은 공정해 하는 안심을 주기보다 아이러니를 느끼게 했다.

게다가 좋은 편이든 나쁜 편이든,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자리 잡은 인간의 복잡함은 그 어느 쪽도 선善이라거나 정의, 절대 악 같은 거대한 이상으로 수렴되지 않았다. 그래서 홈즈의 소설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인간은 나와는 전혀 다른, 처음부터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책 속의 악당들은 어떤 면에서는 모두 나 같기도 했다. 그들이 살인을 저지른 것은 마음속에 악마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질투, 분노, 편견, 이기심, 탐욕 같은 작은 악덕 때문이었으니까.


홈즈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말해 무엇할까? 세상만사에 무관심하고 평소에는 무기력하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약중독자 탐정은 열정적인 정의의 수호자라기보다 많이 배운 덕에 세상만사에 냉소적인 백수 이웃 아저씨 같았다. 그는 어린아이인 우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어서 괴도 루팡과도 달랐다. 루팡과 홈즈 모두 내가 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임에는 틀림없지만 루팡보다는 홈즈가 더 만만해 보였다. 그 작은 도서실을 떠나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후에도 내 추리소설 사랑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동네에 여전히 남아 있는 홈즈의 흔적을 발견하면 ‘어머, 당신도?’ 하는 친근함마저 느꼈다. 일본 작가 시마다 소지가 전형적인 홈즈식 구성으로 쓴 추리소설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홈즈의 여장을 비웃는 대목을 보고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키가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양산 쓴 할머니라니…… 그걸 보니 그제야 코난 도일의 허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왓슨이 번번이 홈즈의 변장을 알아채지 못하고 놀란 시늉을 하는 건 홈즈 이야기를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의 비애였을 거라는 말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다.

그럼 홈즈가 싫으냐는 친구의 말에 주인공은 이렇게 대꾸한다. “누가 그렇대? 완전무결한 컴퓨터에 우리가 무슨 볼일이 있어?내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야. 기계를 흉내 내는 부분이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는 그 사람만큼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은 없어.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타입의 인간이야. 나는 그 선생이 정말 좋아”라고. “허풍쟁이에 교양 없고, 코카인 중독, 망상벽, 현실과 환상의 구별을 못하는,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그 영국인!” 바로 내가 사랑한 홈즈다.


코난 도일이 쓴 홈즈 시리즈를 읽고 편집자가 된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 모두 추리소설을 만들지는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추리소설은 어디까지나 재미로 읽어야 맛이지, 일로 읽으면 제 맛이 나나? (물론 즐겁게 한 길을 가고 계신 『미스테리아』의 김용언 편집장님 같은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홈즈를 읽은 덕분에 그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책을 만들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이상한 이야기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기이한 인간의 삶,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를 계속 들여다보고 탐구해 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 말이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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