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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 Dec 14. 2016

팝 PM 2시

읽는 삶 만드는 삶 4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한순간도 그녀가 그 책들을 다 읽진 않았을 거라고 의심하거나 그것들이 소장가치가 있는 책일까를 두고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더 나아가서 그 책들은 그녀의 마음과 성격의 연장선인 듯 여겨졌다. 반면에 나의 책들은 나와는 기능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내가 장차 본받으려는 특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전체 소설과는 상관없는 부분이었지만 이 대목을 읽고도 나는 두 캐릭터를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의 ‘나’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읽은 책이 아니라 서가의 취향으로도 인간의 유형을 나눌 수 있는데, 이 문장이 대표적인 두 유형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의 서가는 그 책들이 모두 그 사람의 연장인 듯한 느낌이 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성격과 마음이 서가의 책들과는 분리된 채 오로지 그의 지향을 보여 준다.

당연한 얘기지만 책에도 취향이 반영된다. 취향은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소비가 이뤄져야 비로소 생겨난다. 어떤 것에 끌리는 경향성이야 타고나는 것일 수 있지만 세밀한 취향은 절대적 소비량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취향은 자본주의적이고 개인과 도시의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는 촌년이다. 진짜 촌년도 아니고 뜨내기였다. 서해의 섬이나 경기도 변두리 학교를 떠돌아다닌 나는 거기서 만난 아이들처럼 놀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섞인 것도 아니었다. 여름 섬에서는 엉터리 낚싯대를 가지고 놀고 가을 촌에서는 친구네 논 가장자리 원두막에 매달아 놓은 깡통을 두드리며 참새를 쫓으며 놀았다. 겨울이면 땔감을 찾아 야산을 돌아다니며 마른 솔잎과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지만 그저 흉내일 뿐이었다.

마음 한 켠에 난 그 아이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게 때로는 우쭐했고 때로는 서글펐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인천에 정착했을 때 친구들이 만화를 읽고 영화를 보는 것에 문화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이 전날 극장에서 본 영화나 만화방에서 본 만화에 대해 이러느니 저러느니 이야기를 나누면 기가 죽었다. 초등학교 6년을 통틀어 내가 본 영화라곤 밤에만 상영되던 시골 장터 천막 극장에서 본 ‘월하의 공동묘지’, 딱 한 편뿐이다.

시어머니에게 구박 받다가 원통하게 죽은 며느리가 원한에 찬 귀신이 되어 복수를 하는 내용이었다. 흙무덤이 쩍 갈라지고 귀신이 나오는데, 옷에 흙 한 톨 안 묻은 흰 소복 차림이라든가, 요즘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영화였지만 그때의 분위기만큼은 기억난다. 엄마, 아빠도 없이 오빠와 동생, 나 셋이서만 영화를 끝나고 시골의 텅 빈 밤거리를 걸어 집에 올 때는 무섭기보다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클래식이란 것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섬에서  몇 달 피아노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긴 했다. 신학대 출신으로 교회 반주자였던 피아노 선생님은 그 섬 최고 엘리트셨는데, 본업으로 기름을 팔았다. 오토바이에 넣는 휘발유나 난로에 넣는 등유를 파느라 굳은살이 박이고 마디마디 갈라진 손가락에는 검은 기름때가 끼어 있었다. 건반 위를 날렵하게 오가는 길고 하얀 손가락이라는 환상은 와장창 깨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학교에서 썼던 그림 재료는 오로지 크레파스 하나였다. 그림물감이라고는 포스터 물감밖에 써 보지 못한 내게 미술적 소양도 어불성설이다. 명화 한 점 구경해 본 적이 없었고 라디오가 베풀어 줬다는 대중음악의 세례도 나에겐 다른 나라 사람 이야기였다. 피아노 학원과 미술 학원을 다니고 극장을 드나들며 라디오를 듣던 도시 친구들은 내게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딘가에서 책 한 권을 얻게 되었다. 일러스트 하나 없는 시크한 까만색 표지의 제법 두께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데, 아마 오빠가 어디서 얻어 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여튼 그 까만 책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팝 PM 2:00』라는 제호의 그 책은 팝송을 소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달에 두 번씩 무료 배포했던 책자에서 내용을 뽑아 10주년을 기념해 엮은 것이었다.  

팝송과 팝가수가 주요 소재였지만 노래는 모른 채 오로지 책을 통해서 짐작만을 해 볼 수 있었다. 그 책에 많은 부분은 팝의 전설 비틀즈에 관한 것이었다. 비틀즈가 어떻게 결성되었고, 어떤 노래를 발표했고, 공연마다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를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비틀즈 멤버 존 레넌에 대한 애정이 넘쳤다. 80년대 중반이었으니 존 레논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그랬을 것이다.

나이 마흔에 열성 팬에게 피살됨으로서 존 레넌은 신격화됐다. 사춘기를 통과하던 여중생에게 나이 스물에 세계적 밴드였다가 반전평화주의자로 전위예술가와 재혼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존 레넌은 영웅이 되기엔 충분했다. 어찌나 마르고 닳도록 읽었는지 존 레넌에 대해서라면 뭐든 말할 수 있었다. 그 책에는 착취당하는 암소를 빗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 레넌의 시가 암소 실사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는데, 지금 말로 ‘아스트랄’했다.   

지금도 이상한 건, 이렇게 마르고 닳도록 이 잡지를 읽었으면서도 김기덕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는 거다.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이나 「사랑」Love도 가사는 알았지만 실제 노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들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와 밴드,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친구들에게 떠들었다. 내게 이 책은 다른 아이들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았던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하고 가능한 경험일 때도 있다. 당시 나에게 책은 다른 미디어에 비해 접근하기 쉬웠고 보답이 컸다. 내가 팝 음악의 역사와 밴드들의 에피소드로 잘난 척할 때 아이들은 모두 사심 없이 경탄해 주었다. 내가 떠들어 댄 그 밴드의 음악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지는 아마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세련된 취향을 단련해 온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자기 취향에 따라 입장과 호오가 분명한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재기발랄하고 분명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위축된다. 다른 사람이 다 칭찬하는 것을 보고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까 봐,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까 봐 가끔 두렵다. 내 마음을 직접 건드린 음악도, 그림도, 영화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눅 든 내게 책은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알기 전에는 직관적으로 좋다고 느껴도 판단을 유보했다. 무색무취의 모호한 인간이 되어 갔다. 그런데 책을 만들면서 이 열등감은 좋은 쪽으로 작용했다. 잘 모르는 것에 관대했고, 다양한 취향에 포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섣불리 호오를 정하지 않았다. 윤리적인 판단을 제외하고 절대 안 되는 건 없었다. 잘 모르니까 이것도 재미있고 저것도 재미있었다.

세상에는 넓고 얕게 보는 책도 필요하다. 물론 그 하나로 모든 걸 알았다고 끝내면 안 되고(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더 깊은 세계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나는 그런 책들의 필요를 어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한다. 허영이면 어떻고 가짜면 어떤가? 아직 찾는 중인데. 『팝 PM 2:00』가 내게 해 주었던 일을 내가 만든 책이 누군가에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책을 읽고 나서 존 레넌은 직접 듣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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