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정의 필요성 및 방법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도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이 편해서인지, 시장정의보다는 시장규모와 성장률에 더 집중하게 되고, 또 그게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많은 창업가들이 시장규모와 성장률의 값을 정확하게 조사하거나 계산하는데 에너지를 쏟는다. 반복하지만, 시장규모와 성장률을 추정하거나 수치를 찾기 위해선 먼저 시장이라는 대상을 특정해야 한다. 시장을 정의하는 것이 먼저다.
아이템이 도출되어 있으므로 시장을 쉽게 규정할 수 있을까? 시장정의를 단순히 이름 붙이기 정도로 이해해, 아이템 명칭을 보통명사화해 붙이거나 또는 시장보고서 등에서 볼 법한 세부 산업명칭 정도로 시장을 명명한다면 곤란하다. 왜냐면, 아이템이나 산업분야에 붙이는 명칭을 시장정의에 사용하면, 첫째로 고객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고, 둘째로 아이템이 동일하더라도 이를 누구에게 어디에서 어떻게 판매하는지에 따라 시장은 다르게 정의될 수 있는데, 이를 반영하기 힘들며, 셋째로 창업가의 시장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잃게 되는 것이고, 넷째로 시장정의에 의미를 부여하기 곤란하며, 다섯째로 그래서 시장규모가 크고, 성장률이 높다는 말 외에는 전달할 메시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필드에선 대부분의 창업가들이 산업분야의 세부 카테고리에 사용되는 명칭을 차용하거나 또는 아이템 명칭에 '솔루션 시장'이나 '시스템 시장'을 붙여 이름을 붙이고 있을지 모른다. 또 한편에선 선배창업가 또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사업계획서 작성 팁(Tip)이라며 알려주는 노하우가 그런 방법일지 모르겠다. 이를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엔 나 역시 교육현장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코칭하기도 한다. 하물며 우리가 찾게 되는 시장보고서만 보더라도 시장을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시장은, 고객이 모이는 곳으로, (잠재)고객집단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시장을 정의할 때, 창업가는 아이템을 구매할 고객이 누구인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고객 외에도 시장의 범위와 특징을 동시에 규정짓는 요소로서 지역과 채널,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이템이 있다. 고객 측면에선 고객의 문제가, 그리고 아이템 측면에선 제공가치도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볼 수 있다. 지역은, 크게 국내와 국외, 또는 글로벌 시장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고, 국내만 하더라도 서울, 수도권, 로컬, 지방도시 등으로 그 범위를 어떻게 한정하느냐에 따라 시장의 크기나 특성이 크게 달라질 수 있으며, (판매)채널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만 구분하더라도 속성이 크게 달라진다. 그러므로 시장은, 고객 및 고객의 문제, 지역, 채널, 제공가치, 아이템(해결방법) 등을 모두 포함해 정의될 필요가 있다.
다만 고객에 대해선 추가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사용자가 존재하는 경우다. 사용자는 창업가의 아이템을 실제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고객이라 부를 수 있지만, 비용을 지불하거나 구매결정을 직접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용을 지불하거나 구매결정권을 가진 고객과 구분하여 '사용자'로 부르겠다. 시장정의에 적용할 고객은, 사용자가 아니라, 창업가에게 비용을 지불하는 '고객'이어야 한다. 창업 아이템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사용만 하거나, 소비만 하는 '사용자'를 중심으로 시장을 정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간혹 수익모델을 만들지 못한 채로 사용자 수를 확보해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라면 극히 예외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정이라는 것도 어떤 실익이 있는지 개인적으로는 판단이 되질 않는다. 대표적 예로 당근마켓(최근 '당근'으로 리브랜딩 했다.)이 있다. 당근마켓은 중고거래 이용자들로부터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대신 광고료로 수익을 창출하는데, 그렇다면 당근마켓이 제시해야 할 시장의 정의는 지역광고시장이 되어야 하지, 중고거래시장이 되어선 안된다.
시장을 정의할 때는, 핵심 키워드 2~3개 만을 사용한 짧은 문장 형태가 아니라, 가능한 구체적이고, 길게 초안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시장을 정의함에 있어 하나의 키워드 형태가 아닌, 긴 줄글의 방식으로 작성하면, 다수의 키워드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시장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다수의 키워드가 AND 조합으로 결합되며 시장의 경계를 좁히는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나는 창업코치로서 시장분석을 주제로 교육할 때, 예비 또는 초기 창업가에게 줄글 형태로 가능한 주저리주저리 구체적으로 시장을 정의하도록 요청한다. 단순히 시장을 정의하는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창업가가 사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그래서 자신만의 관점이나 해석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기둥' 또는 '코어'라고 부른다. 창업가에게 이 코어가 생기면, 의사결정이나 선택을 해야 할 때 일종의 기준으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들은 모여서 일관성을 만들어 낼 것이고, 나아가 창업가(팀)에게 자연스럽게 정체성을 부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가 창업코치로서 가진 관점이다.
('창업가의 관점'이라는 용어는, '언더독스'의 '혁신창업방법론'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개념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장문으로 시장을 정의해놓고 보면, 거점시장(SOM)의 규모가 매우 작아질 수 있는데, 이를 별도로 SOM의 하위개념인 초기진입시장(LAM, Launch Addressable Market)이라 정의할 수도 있다. 시장정의 초안을 압축적으로 작성할 필요는 없으나, 사업계획서에 줄글 형태의 초안 그대로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넣을 공간도 없다. (발표자료가 아닌 한글이나 워드 파일의 사업계획서라면 줄글 초안을 다듬어 시장정의의 상세설명으로 사용하는 방법도, 탐샘솜의 내용을 반복해 텍스트화하는 방법보다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때문에 장문 형태의 초안 작성이 완료되면, 반복해 읽어보면서 핵심 키워드와 압축적 표현으로 초안을 수정하며 짧은 한줄 형태로 변환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창업가가 기획한 사업을 핵심 키워드를 이용해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을 시장정의라 이해해도 좋다. 결론적으론 시장정의를 키워드 몇 개를 사용해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을 수 있지만, 과정이 다르고, 그 과정 속에서 '창업가의 관점'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아니 만들지 못하더라도, 그 시간은 창업가에게 유의미하게 다가갈 것이다.
장문의 시장정의 초안을 한줄로 압축하는 방법
지역(채널) + (고객의) 문제상황 + 타겟팅된 고객 + 제공가치(~을 제공/전달하는) + 아이템 (제품명, 서비스, 솔루션, 시스템, 플랫폼) + "시장"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본 글의 앞에서, 아이템 선정기준으로 시장규모가 클 것을 요구했는데, 시장정의를 통해서 시장범위를 축소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가지 정도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데, 먼저 예비/초기단계에서의 초기진입시장은 타겟팅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고, 초기진입시장의 범위가 (좁고) 명확할수록 시장진입전략을 수립하기 용이하다. 여기서의 시장진입전략을 마케팅 전략으로 이해해도 좋다. 그리고 둘째로 초기진입시장의 범위가 좁더라도 탐샘솜(TAM, SAM, SOM)을 사용해 시장확장방안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타겟팅과 성장성을 모두 포괄해 설명할 수 있다.
타겟팅이 필요한 이유는, 창업가(팀)는 자원이 부족함에도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존재로, 시장에선 후발주자다. 때문에 니치마켓(Niche market, 틈새시장)을 찾아야 하고, 고객 및 문제를 정의하는 과정도 이를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업이 실패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시장이 좁아서가 아니라, 고객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즉, 팔리지 않아서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시장에는 가격경쟁력까지 갖춘 대기업의 제품 및 서비스가 다수 존재한다. 창업가는 차별화를 말할지 몰라도, 고객은 대체재를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환경에 후발주자로 참전하는 창업가가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명확한 타겟팅과 고객 니즈에 부합하는 가치를 제공하는 아이템으로 공략해야만 할 것이다.
마켓컬리는 현재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는 이커머스 플랫폼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엔 신선식품과 새벽배송을 통해 시장에 진입을 시도했고, 그 전략은 유효했다. '좋은 품질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사람들'로 고객을 설정하고, '가족들의 건강한 식사를 위해 식재료의 질을 중시하는 주부', '믿을 수 있는 상품을 편안하게 받아보길 원하는 맞벌이 부부', 그리고 '자신을 위한 소비에 가치를 두는 1~2인 가구' 등으로 고객을 타겟팅한 후, '믿을만한 신선식품을 고객이 먹을 때까지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객의 집 앞까지 안전한 방법으로 배송하는 것'을 솔루션으로 도출했다고 한다. (출처: 마켓컬리 인사이트, 김난도 / 쏘냐의 인사이트 아카이브 https://blog.naver.com/jsrsoda/222247624548)
'문제정의' 파트에서 타겟팅된 고객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시장정의'에서 고객을 명확하게 정의해야 제3자 입장에서 해당 사업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피칭덱의 9개 본문 목차 중 고객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항목을 살펴보면, '문제정의'와 '시장분석' 외에는 없다. '비즈니스 모델'과 '시장검증(사업성과)' 파트에서도 고객에 대해 언급할 수는 있지만, 이 2개 목차는 본 글에서 제시하는 목차 순서상 뒤쪽에 위치한다는 점, 그리고 각 목차마다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와 목적이 존재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시장분석'에서 고객을 명시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본 글은 피칭덱의 본문 목차를 문제정의로 시작으로 아이템, 시장분석, 경쟁분석, 비즈니스모델, 시장검증/사업성과, 향후전략, 재무계획, 팀역량 순으로 9가지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사업계획서 초안을 완성한 창업가라면, 사업계획서 및 피칭덱에서 고객을 언급하고 있는 곳이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정의하거나 전달하고 있는지 검토해 보자. 사업을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누구에게 판매하는지가 빠져 있다면, 또는 설정되어 있더라도 타겟팅 관점에서 의미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면, 공급자 관점에서 자기만족으로 만들어진 문서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데모데이 또는 지원사업 발표평가 등을 경험하면서, 시장규모나 성장률(CAGR)에 대한 질문만 받았을 수 있다. 시장정의가 어떻게 되는지, 또는 고객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을 수 있다. 이렇게 답해보겠다. 일단 질의응답 시간이 짧았을 수 있다. 시간이 짧으면 고객에 대한 질문을 하기 쉽지 않다. 이야기가 길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은 창업가가 고객 타겟팅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고민을 어디까지 해봤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넘어간다. 고민의 깊이가 얕으면, 논의에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시장은 분석이 아닌 해석이다(1) - 생각의 크기가 곧 시장기회의 크기다, 콘텐츠 큐레이터 ONE, CPST 코어피칭 연구회, 2024.5.8., https://brunch.co.kr/@medus/50
시장을 정의하는 방법에 정답이나, 옳고 그름이 어디 있겠는가? 시장정의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나 중요성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평가위원들 중에서도 시장정의를 나처럼 의미 있게 검토하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다. 성급한 일반화의 논리일 수도 있겠지만, 기술/연구개발 분야 또는 엔지니어 출신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내가 그랬다. 내가 원래 부족한 사람이라 그럴지 모르지만, 나 역시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특허조사분석 및 컨설팅을 업으로 사회생활을 했는데, 당시엔 고객에 대한 접근이나 고민 자체를 하지 못했었다. 왜냐면, 사업 관점에서 시장을 바라보지 못했고, 공급자 마인드에서 벗어나 생각하지도 못했었기 때문이다. 고객 세분화와 타겟팅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낮았었기 때문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또 그래서 공허한 것으로 간주해 버렸다. 그래서 내외부 환경분석을 하더라도 고객을 포함시킬 수 없었고, 그럴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시장분석을 하더라도 트렌드 분석 이상의 의미를 뽑아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창업 영역에 들어와 일하고 배우며 시장정의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았다.
시장을 정의하는 방법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이템이나 고객, 산업분야에 따라 보다 정답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것이 다를 수 있고, 기업이 성장하거나 투자유치단계가 올라갈수록 커버하게 되는 시장의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시장의 정의도 바뀔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맞고 틀리다는 이분법적인 접근은 위험하다. 다만 본 글을, 예비 또는 초기창업가를 대상으로 작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비/초기단계의 창업가는 자신만의 관점(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선 거점시장(초기진입시장)을 장문 형태로 구체적으로 정의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시장정의를 통해 창업가가 자기만의 시장에 대한 접근(해석, 관점)을 드러낼 수 있다면, 그 점에선 다른 경쟁자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음도 인지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