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점심시간 1시간을 위한 생각'이라는 글을 포스팅한 적이 있다. 이 글은 내가 쓴 포스팅 중에 가장 반응을 많이 받은 글 중에 하나다. 그 정도로 우리는 비생산적이고 획일적인 단합대회 성격을 띤 식사자리에 대해 피로함을 느낀다. 혐오한다.
그런 맥락의 이야기를 친한 후배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내 생각은 이러하다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선배님, 그러면 저번에 우리 회식 왜 반대 안 하셨어요? 전 선배면 무조건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그때 당시엔 "그러게 말이다. 근데 말이지... 너도 지금 나랑 밥 먹자고 나왔잖아, 누군가에게는 지금 우리가 밥 먹는 거처럼 그 회식이 필요한 자리일 수도 있으니까?"라는 말로 대답했다. "아이, 선배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라는 타박을 들었다. 사실 스스로 조금은 고민을 하라는 의미에서 내놓은 반쪽자리 정답이다. 회식의 단점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회식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유. 풀어서 이야기해보자면 이렇다.
조금은 옛날 우스갯소리지만 석사와 박사 위에 '밥사'가 있는 소리가 있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정치적 고비마다 비장의 칼로 '식사 정치'카드를 뽑아 들었다. 2013년 3월, 공화당과 민주당은 예산안 처리를 두고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웠다. 예산안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공화당 의원 12명을 백악관 인근 호텔로 초대했다. 폭설을 뚫고 거물급 정치인들이 집결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사 비용은 오바마 대통령이 사비를 털어 계산했다. 오바마는 의원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계산서에 사인했다. 정국은 날씨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지만, 호텔의 나서는 의원들의 입가에는 봄을 닮은 웃음기가 돌았다. 식사 자리에서 건설적인 대화가 오갔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런 회식을 나는 바란다. 물론 내가 속한 공직사회는 이런 회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래도 그나마 이렇게 규모가 큰 전체회식은 폐쇄의 끝을 달리는 공직 사회에서 몇 안되게 서로의 의중을 확인이라도 할 수 있는 자리이다.(안타깝게도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요원한 상황이다.) 더욱이 동아시아권인 우리나라는 공동체 구성원끼리 공유하는 배경이 비교적 강한 문화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동일한 시간과 상황을 함께하고 있다는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 토양 위에서 대화의 꽃이 피어난다. 식탁을 마주하고, 반찬을 권하거나 하며 일상의 고단함을 공유하고 상대의 온기를 느끼던 문화다. 최초의 회식문화의 기원도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오죽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겸상'이라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오바마의 방식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태도는 물론 장소와 방법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전문가들은 "메신저가 곧 메시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상대방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더라도 메시지를 전하는 당사자의 태도와 방법이 적절하면 메시지로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장소도 메시지"라고 덧붙이고 싶다. 메시지와 그것을 전하는 장소는 밥과 밥공기의 관계와 유사하다. 밥 맛을 결정하는 것은 좋은 쌀과 맑은 물만이 아니다. 은은한 백색 바탕에 너무 요란하지 않은 그림이 그려진 전통적인 밥그릇에 담을 수도 있고, 누르스름한 옛날식 놋그릇처럼 생긴 밥공기에 담을 수도 있으며, 국밥집에서 늘 보는 빛을 튕겨낼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을 수도 있다.
메시지도 이와 비슷하다. 메시지의 내용 못지않게 그것을 표현하는 공간과 시간적 배경 또한 메시지의 전달력과 설득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결혼을 앞둔 시점에는 한식집에서 상견례를 제일 많이 하는 것은 부모님들을 생각해서다.
제발, 올해 연말회식은 늘 가던 술 냄새가 가득한 고깃집이 아녔으면 좋겠다. 어느 회사든 타인과의 공감대가 생길 시간과 장소가 확보되고, 그리고 그 안에서 공감 가는 메시지가 오가는 회식이 한 자리라도 늘어나길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