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짬뽕 뮬란 Dec 07. 2022

하루 아침에 생긴 게 아니야

의심하다

우울증은 수많은 원인으로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 요인, 정신적 요인, 호르몬, 유년기, 심리적 요인 등이 있다. 내 우울증 역시 하루아침에, 한 순간에 온 것은 아니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나는 소아 우울증부터가 시작이었다. 소아 우울증의 증상으로는 주로 불면증과 복통이 있는데 나는 매일 배가 아팠고 새벽에 잠이 깨서 잘 자지 못했다. 늘 가위에 눌렸는데 우선 매일같이 배가 아팠다. 배가 자주 아픈 나를 위해 할머니는 잠들기 전 당신 손이 약손이라며 내 배를 어루만져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내게 처음 물었다. “너 우울하니?” 나는 우울하다는 말을 몰랐다. 그러나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늘 그늘진 내 얼굴이 아홉 살 난 아이처럼 보이진 않았으리라. 집에 국어 사전이 있었는데 그날 집에 돌아와서 언니들이 쓰는 국어 사전을 뒤져서 ‘우울’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다른 건 기억이 안나지만 ‘활기가 없음’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활기가 넘치는 아이는 아니었다. 친구들 앞에 나서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고 누군가 내게 말을 걸지 않기를 항상 바랐다. 한 친구가 내게 말을 걸려고 하면 나는 눈치를 보고 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순 없다. 그저 사람이 무서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들을 따라 가출을 했다. 원래 처음부터 가출을 계획한 건 아니었다. 친구들을 따라가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친구들은 당일 아침 나를 데려가 주겠다고 말했다. 당시 왕따였던 나는 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지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이 친구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하며 좋아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가출을 하고 하루 만에 우리는 경찰에 잡혀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경찰에 붙잡혀 온 나는 작은 아버지에게 사정없이 매질을 당했다. 종아리를 때린다든지 손바닥을 때리는 수준이 아니라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을 맞아야 했다. 그날은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 마당에 나무가 있었는데 나무를 부러뜨려 그 나무를 챙겨 들었다. 작은 아버지는 내 머리채를 끌고 나를 집 안으로 데려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작은아버지는 그 나무로 내 머리를 내려쳤다. 그 매를 맞고 거실에서 기절을 했는지 일어나보니 안 방이었고 작은 어머니는 나를 더 때리라며 부추기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눈을 뜬 나를 보더니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사정없이 매질을 당했다. 비가 와서 나무가 젖어있었는데 그 나무의 냄새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를 때릴 때 사용하던 그 나무 냄새와 내 얼굴을 그 막대기로 강타했는데 내 얼굴을 때리면서 입 안으로 들어왔던 나무 껍질 맛이 있었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면서 알게 됐는데 정신분열증 증상 중 하나인 환후와 환미를 경험하고 있었다. 환미와 환후는 맛이나 냄새를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지만 환자 자신만 특정한 날이나 특정한 상황이 왔을 때 그 맛과 냄새를 실제처럼 느끼는 경우라고 한다. 약을 먹으면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 비에 젖은 나무 냄새는 지금도 난다. 견디지 못하겠는 사실은 그 나무 냄새와 맛은 꼭 공황발작과 함께 온다.     


그날 작은 아버지에게 3시간 정도를 매질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머리를 숙여 혼자 씻을 수도 없을 만큼 고통이 따랐다. 그렇게 맞고 나서 며칠을 어지러워했다. 계단을 오른다거나 앉았다 일어나면 어지러움이 심각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내 몸은 까맣게 멍이 들어 있었다. 갈비뼈를 나무로 때리셨는데 갈비뼈의 모양대로 검정색이 물들어 있었고 나는 그 색깔을 숨기기 위해 긴 팔 긴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니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나는 왕따였다. 뒤늦게 알았다. 내게 가출을 강요했던 친구들은 그저 심부름꾼 같은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가방에 담배와 라이터를 넣어놓고 나는 오해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 친구들이 담배를 필 때도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작은아버지는 내 가방에 넣어두었던 돈과 담배, 라이터를 보고 나 혼자서 저지른 행동이라 오해하시곤 더 나를 때렸다.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억울하지도 않았다. 대화가 가능한 분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어린 아이가 불쌍했다. 


매질을 당하던 그날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한 마디의 말만 꺼냈다. 죽여주세요. 나는 그 말이 전부였다. 작은어머니는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나를 죽여달라고 말하는 말에 놀랐는지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왔냐며 더 때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다. 진심이 나왔다. 매질을 당해서가 아니었다. 내 마음을 처음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도 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아버지가 날 반기지 않을까 무섭기도 했다. 아버지는 두 명의 딸을 낳고 세 번째 낳은 자식마저 딸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집어던졌다고 했다. 그때부터였겠지.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조건없이 사랑을 받고 보호받아야 할 시기에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아니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의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던 어린 아이의 우울증은 번개 맞아 생긴, 하루 아침에 생겨버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적정한 삶을 산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