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짬뽕 뮬란 Dec 13. 2022

누구나 마음 속에 한 채의 집은 있다.

노력하다



각자 사람마다 마음 속에 한 채의 집이 있다고 한다. 

그 집을 어떻게 가꾸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향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마음의 집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내 마음이 아플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고 한다. 

집이 처음 생성됐을 때는 부모님의 역할이 중요하다. 

집을 청소하는 방법, 집을 꾸미는 방법, 창문을 열고 환기시키는 방법 등 여러 가지를 알려주는 역할이 부모의 몫이라고 한다. 


나는 한 채의 오두막집을 가지고 자랐다. 그래서 지금은 집 청소를 할 때마다 마음의 집을 가꾼다는 생각으로 청소를 한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적부터 집을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배우지 못하며 자랐다. 청소를 해야 하는 이유도, 청소를 하는 방법도 모르고 자랐다. 그렇게 내 마음의 집은 조금씩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먹고 자고 사는 내 집에 거미줄이 생기고 쓰레기가 쌓여도 그 쓰레기를 집 밖으로 배출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과의 추억이 없는 아이였다. 언니들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의 이야기,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언니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나는 부모님과의 기억이 많지 않았다. 청소하지 못한 내 마음의 집에는 쓰레기가 쌓이면서 악취가 생기고 벌레가 생기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닫았다.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이 퀴퀴하고 어두운 집에 나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내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안에 있는 나 자신이 들통나기라도 할까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내 마음의 집은 그랬다.


대학교 때 내 세상이 죽었다. 나를 위해 20여 년을 사신 내 할머니가 혼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호상이었다. 호상이란 보통 별다른 지병 없이 평균 수명 이상 장수하다가 잠자듯이 죽은 경우에 쓴다. 사람들은 내 세상을 호상이라고 말했다. 호상을 맞은 내 세상에 우울감은 말할 것도 없이 극에 다다랐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서울로 와서 여느 날처럼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당시에 다니던 병원은 나이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이 계시던 곳이었다. 손녀처럼 나를 예뻐해 주셨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었고 나를 위로해주시던 분이었다. 어떻게 지냈냐는 말 의사 선생님의 말에 눈물을 쏟아내기 바빴다. ‘할머니가 죽었어요. 할머니를 따라가고 싶어요.’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쳐다보시더니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여기에 한 번 가서 치료를 받아보는 건 어떠니? 내 이름을 얘기하면 더 따뜻하게 맞아줄거야.’ 


최면 치료를 하는 곳이었다. 최면이라니. 선생님도 나를 포기했구나 생각했다. 더 이상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것 같다며 내게 다른 병원을 권유하셨다. 며칠이 지나고, 명함에 적혀 있던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동네였다. 


큰언니의 걱정에 원하지 않았지만 작은 언니와 함께 병원에 가게 됐다. 작은 언니는 의사를 만나서도 나의 증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동생이 우울증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주변에 우울증 때문에 병원에 다닌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 언니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는 우울증 치료도 지금같이 편안한 시선이 아니었는데 최면 치료라니. 말문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한두 번의 최면으로 치유가 되는 것도 아닌 일에 수백만 원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작 대학생이던 20대 초반인 나는 돈이 없었다. 작은 언니는 집으로 돌아가는 1시간 반 동안 지하철에서 내게 상처주는 말을 쉬지 않고 했다. 언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런 나를 창피해했다. 그때의 상처는 지금도 사실 마음 한 켠에 남아있다. 나는 언니를 이해하려고 오랜 시간 노력했다. 의사는 밖에서 기다리던 우리 언니를 진료실로 불러 설득도 했다. 동생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치료를 거부했던 작은 언니의 결정으로 그냥 집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최면 치료사였던 그분이 해준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선생님이 알려주신 것이 바로 마음 속에 있는 한 채의 집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 마음의 집은 어떨까 궁금하기 시작했다. 집을 어떻게 가꾸는 지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면 내가 스스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남들 집을 따라 해보자 하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사람을 대하고 친구들을 만나면 저 사람 마음속에는 이런 집이겠구나, 저런 집이겠구나 짐작해 보기도 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사람이 시멘트 벽 같아, 틈이 없이 촘촘하게 세워진 벽 안에 있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펑펑 울어야 했다. 내 마음속의 집이 어떤지 그려본 적이 없었는데 친구가 내게 해준 말로 내 집이 그려져 버린 것이다. 창문을 닫아버리고 안에서 시멘트를 발라버린 내 마음의 집. 누구도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현관문에 못을 박았고, 햇빛이 들지 않게끔 꽁꽁 닫아놓은 내 마음의 집. 어떻게 해야 그 벽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밖에서 누군가 두드려도 그 문을 열어주지 못하는 내 마음의 집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도 내 마음이 불안할 때 마음속에 있는 집을 생각한다. ‘아 청소할 때가 됐구나’라든지 ‘환기가 필요해’라든지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환기를 하고 청소를 해야 할까도 같이 고민하게 된다. 나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잘 몰라 그저 꾹꾹 눌러 담기만 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마음속 집 한 채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 같다. 내 마음의 집은 평생 나 자신과 함께 가야 한다. 내가 이 집을 잘 가꾸고 예쁘게 꾸며서 나의 내면을 잘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속 집 한 채는 어떤 모습인가? 당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한 번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떤 집이기를 바라는지 상상도 함께 해봤으면 한다. 나는 상상 속의 집 한 채와 현재 내 마음의 집을 비교하며 상상한다. 더 나은 마음의 집을 만들리라 하고 매일 결심한다. 병원을 오래 다니며 상담 치료를 병행했다. 결국 내 마음속 집은 차차 나아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누가 내 마음의 집에 들어와도 전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감사 일기 하나로 변화를 경험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