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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음 Mar 28. 2022

카페 '루루흐'가 주는 공간의 의미

고객 지향적인 관점과 소신을 지켜내는 힘

머릿속이 복잡할 땐 일단 밖으로 나간다. 그러다 무작정 동해 바다로 떠났던 어느 날의 이야기.


속초에 간 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때였다. 왜 속초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아무 계획없었고, 이왕이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으면 생각하던 와중, 노선표에 적힌 속초라는 지명이 유독 크게 보였던 탓이었을까. 속초로 향하는 버스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검색해보다가 한 카페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 공간, 뭔가 다르다.








입구의 대나무가 반기는 이곳은 속초의 '루루흐'라는 카페다.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있어 통유리 너머로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차별화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궁금하게 만드는 메뉴



벽면에 붙은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봤다. 커피를 좋아해서인지 다른 곳에서 맛보기 어려운 메뉴에 도전하는 편인데 필터 커피 종류가 3가지라 고민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이한 건 계절 블랜딩이라는 메뉴가 따로 있는데, 겨울 방문 기준 '겨울잠'이라는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계절에 따라 블렌딩 원두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점이 또 하나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계절마다 다른 메뉴를 맛볼 수 있다는 건 이 공간에 대한 또 다른 궁금함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푸릇푸릇한 여름에 오면 또 어떤 블렌딩 메뉴가 있을지 기대감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하지 않을까.


루루흐는 커피뿐 아니라 디저트도 눈길을 끈다. 대표적으로 두유 요구르트, 비건 밀크티 등의 비건 메뉴가 있으며, 방문한 일자 기준으로 흑당 호두 스콘과 단호박 쌀머핀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왕 온 김에 모두 맛보자 싶어, 비건 디저트 메뉴 2개와 계절 블렌딩(겨울잠)을 주문한 후 자리를 잡았다.





공간의 톤 앤 매너를 완성하는 인테리어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우드톤과 화이트톤의 인테리어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차분하고 단정한 분위기는 이 색상에서 나오는 것. 책장이 있는 줄 모르고 읽을 책을 들고 갔는데, 구경해보니 내 취향의 책도 여럿 있었다. 들고 간 책 대신 책장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가져와 가벼운 마음으로 한 장 두장 읽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메뉴를 가져다주셨다.





'블렌딩' 원두를 시로 표현한 섬세함



쌀머핀은 포장을 부탁드려, 사진 속 메뉴는 흑당 호두 스콘과 계절 블렌딩(겨울잠) 필터 커피다. 해당 블렌딩에 대한 글이 적힌 엽서 형태의 종이를 함께 주신다. 어떤 원두를 블렌딩 했는지 적지 않았음에도 시를 읽다 보니 원두가 어떤 느낌과 맛인지 은은하게 와닿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사실' 보다도 '느낌'과 '이해' 아닐까. 향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탑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를 알려준다한들 그들에게는 그저 향수 중 하나다. 그것보다는 어떤 상황에서 맡으면 좋은지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해주는 것이 더 이해도 빠르고 직관적으로 와닿을 것이다.


실제로 이니스프리의 디퓨저 제품 네이밍 중 하나는 '꽃비 내린 아침의 흙'이다. 향을 잘 모르더라도 '우디향' 보다 훨씬 와닿지 않는가? 이처럼 고객이 체감하기 쉬운 단어로 제품이나 서비스의 핵심을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겨울잠'이라는 시에서도 체감할 수 있었다.






가치관이 묻어 나오기 위해선 장소의 제약이 없다


루루흐의 아이덴티티가 가장 두드러지는 장소는 의외로 화장실이다. 동물성 제품이 없는 비건 카페인만큼, 화장실에도 관련 내용을 정리하여 편지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비건도 비건이지만, 손님에 대한 배려에 대해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문에 붙여진 포스트잇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휴지는 휴지통에 부탁드립니다. 변기가 막혀 놀라실 수 있어요. ㅠ.ㅠ


이제껏 어떤 화장실에서도 볼 수 없었던 톤 앤 매너다. 변기가 막히면 벌어지는 좋지 않은 상황을 언급한(공급자적 마인드) 문구가 대부분이었는데, 이곳 루루흐는 '놀라움'이라는 단어를 통해 손님이 느낄 감정을 언급한다.(사용자 마인드)

저 문구를 본 손님은 괜히 더 신경 쓰고, 조심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 하나쯤이야'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솝우화 중 하나인 '해님과 바람'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많은 브랜드에서 제품 및 서비스를 출시할 때 간과하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그 브랜드의 일원이다 보니 자꾸 기업의 입장에서 의사를 전달하고, 상세페이지의 구성하고, 가이드를 작성하고, 광고 카피를 기획한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 고객이 어떤 페인 포인트를 겪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루루흐의 화장실에서 또 한 번 상기시켰다. 장소가 조금 멋쩍을 수는 있지만 값진 리마인드였다.


루루흐는 일회용품으로 인한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언급하며 빨대를 사용하지 않고, 테이크 아웃은 개인 텀블러에 가능하다. 말로만 비건과 친환경을 외치지 않고, 직접 실천으로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곳을 굉장히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다. 확실히 친구와 만나 수다 떨러 가기에 적합한 카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루루흐에서 직접 소개한 문구처럼 '사색하는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 적합한 조용하고 다정한 공간'이다. 당연히 사업자 입장에서는 더 많은 손님을 한꺼번에 받고 더 큰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그리고 이건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가치관과 소신을 꾸준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다 보니 널찍한 테이블 간의 간격과 매장 이용 규칙이 더 크게 와닿았다.



단단하게 쌓아 올린 신뢰와 손님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공간, 속초에 간다면 루루흐에서 잠시 고요한 내적 평화를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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