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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새롬 Dec 24. 2017

#102.갈리폴리, 역사상 최악의 전투 속으로

보통 남녀의 365일 세계여행 기록

#터키 #차나칼레 #에자밧

#다르다넬스해협 #갈리폴리전투

#2017년9월13일~15일


<터키 서부에 위치한 갈리폴리 반도.>

 인류 역사상 전쟁은 언제나 끔찍했으며 단 한 번도 자비로웠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권력자들의 욕심은 항상 피를 원했다. 우리가 일곱 번째로 방문하게 된 갈리폴리 반도에서도 영국의 수상 처칠에 의해 수많은 군인들이 희생당하는 최악의 전투가 펼쳐졌었다.

<출처: 두산백과/다르다넬스 해협은 이스탄불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어느 날, 젊은 나이에 해군성 장관에 임명된 처칠은 연합국인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한 보급로 확보에 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그는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발견한다. 이곳을 통과하면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까지 곧장 진격할 수 있는 데다 흑해를 통해 러시아로 손쉽게 보급품들을 수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큰 공적을 쌓기만을 바라던 처칠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곳으로 진격하며 아주 자신만만하게도 이런 말을 남긴다.


'일주일 뒤면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르다넬스 해협은 폭이 매우 좁은 데다 해안선을 따라 방어용 포대가 길게 늘어져 있어 통과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지역이었다.

<차나칼레에서 갈리폴리 반도로 들어가기 위해 페리 탑승. >

 영국 육군도 그의 작전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처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군 단독으로 작전을 실행하고 만다. 사실 당시 터키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국가였기 때문에 영국-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연합국과 손을 잡을 수도 있었고, 독일-오스트리아를 주축으로 한 동맹국과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가장 오랜 적이었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결국 동맹국 측에 섰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공격하러 오는 연합군과 부딪히게 된 것이다.

<잔혹한 전쟁의 무대가 된 다르다넬스 해협.>

 전쟁 초반 터키는 열심히 해안포를 이용해 영국 군함을 공격했다. 영국도 어마어마한 군함으로 열심히 터키의 진지를 향해 포를 날렸다. 하지만 터키의 군인들은 보통 농사짓다 온 사람들이라 훈련이 매우 부족했고 문맹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포 하나 제대로 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국군도 물살이 센 바다 위에서 포를 쏘려니 영 조준이 안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공격들은 서로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고 전쟁은 점점 흐지부지 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때 터키가 둔 신의 한 수로 상황은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출처: 위키디피아 / 기뢰에 격침당한 영국 함선 이리지스터블.>

 깜깜한 새벽, 제대로 된 군함 한 척 없었던 터키군은 자신들의 나무배를 타고 영국 군함이 매일 오가는 길목에 기뢰를 잔뜩 심는 작전을 수행한다. 자칫하면 기뢰에 본인들이 당할 수도 있고 영국군에 들킬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배치된 기뢰들은 프랑스 군함을 시작으로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영국의 군함들까지 차례로 격침시키고 만다. 결국 처칠은 이를 계기로 해군성 장관직에서 사임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연합군은 포기하지 않고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진행했고, 여기에서부터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모를 잔혹한 역사가 시작되어버린 것이다.

<해안선에 남아 있는 전쟁 당시의 흔적들.>

 우리는 전쟁이 벌어졌던 곳과 멀지 않은 에자밧이라는 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그동안 책으로만 배워왔던 역사를 직접 대면하고 싶어 투어를 통해 해당 장소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부터 시작된 투어에는 당시 참전국이었던 영국, 호주, 뉴질랜드, 독일 등에서 온 사람들이 주로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달려 찾아간 해안가에는 참호나 포대의 흔적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었다. 가이드는 잔잔하기 이를 데 없는 바다를 배경으로 그 당시의 격렬했던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출처:위키디피아/ 안작해변에 내린 뉴질랜드 군인들.>

 1915년 4월, 첫 번째 전투가 끝나고 한 달 만에 '갈리폴리 상륙작전' 꾸려졌다. 하지만 당시 군사의 대부분은 파리 코 앞까지 치고 들어온 독일군에 대응하기 위해 보내졌고, 그로 인해 갈리폴리에는 영연방 국가의 일원이었던 호주와 뉴질랜드의 안작군과 인도군이 보내지게 되었다. 하지만 호주와 뉴질랜드는 이렇다 할 상비군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징집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90%가 일병으로 채워진 군대가 파병되기에 이른다. 이들의 대부분은 이십 대 초반이었고 십 대도 굉장히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급하게 보내진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철모 하나 지급되지 않았고, 물과 식량에 대한 보급도 충분치 않았다.

<좁은 안작 해변을 가득 에운 보급품과 전함들>
<직접가서 본 해변의 폭은 믿을 수 없을만큼 좁았다.>

 이들은 어렵사리 명령받은 지점에 도착했지만 조류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1km 떨어진 곳에 상륙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곳은 상륙하기에 최악의 장소였다. 군인 수십 명이면 가득 찰 정도로 해변의 폭이 말도 안 되게 좁았던 것이다. 우리도 직접 가서 봤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장소 선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침없이 타고 온 전함에서 내려 작은 보트에 올랐고 노를 저어 해변으로 향했다. 하지만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탈수로 쓰러거나 사망한 병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까마득하게 솟아있는 경사 70도의 절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그것도 대포를 이고 말이다.

<200kg이 넘는 포탄을 맨몸으로 옴겼던 터키군들의 모습.>

 이렇게 안작군이 죽을힘을 다해 공격할 동안 터키군도 각종 고초를 겪고 있었다. 고지를 차지하고 있던 터키군은 대포와 포탄 및 각종 무기들을 진지가 있는 산 꼭대기까지 이동해야 했는데 사람과 나무 수레 등으로 옮기다 보니 보급이 느려지고 나중에는 총알이 없어 공격을 못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터키군은 결국 치열하게 절벽을 기어오른 안작군에게 고지를 빼앗기고 만다.         

<케말 파샤 장군은 이후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터키 군인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 케말 파샤라는 젊은 장군이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며 총알이 없으면 칼을 차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때부터 고지에서는 병사 하나하나가 온몸으로 서로를 막는 처절한 백병전이 펼쳐졌다. 결과는 터키의 승. 하지만 그날 제국들의 패권 다툼에 휘말린 수많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피비린내 나는 땅 위에서 눈을 감아야만 했다. 결국 누구의 승리도 중요하지 않은 날이 된 것이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작은 불꽃처럼 살아있던 인류애>

 이후에도 연합군은 북쪽에 위치한 수블라만을 통해 한 번 더 상륙작전을 시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양측 다 엄청난 사상자만 낼뿐 어떤 결론도 얻을 수 없었다. 터키군과 안작군은 겨우 10m 남짓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밤낮없이 대치했는데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휴전 중일 때는 담배나 초콜릿도 나누는 등 인간적인 교류를 했다고 한다. 한 번은 다시 시작된 치열한 전투 중 안작 병사 하나가 부상을 입고 터키군 참호 근처에 쓰러져 있었는데, 터키군 병사가 묵묵히 부상당한 안작 병사를 들어 상대편 참호에 데려다주었다고.

<희생당한 군인들의 추모를 위해 만들어진 공원묘지.>

 얼마 후 영국군은 이 전쟁이 더이상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고 후퇴를 명령한다. 그렇게 역사상 '최악'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들의 전투가 펼쳐졌던 해변에는 '안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터키인들에게도 그날은 분명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을 테지만 그곳에서 사그라든 호주, 뉴질랜드의 젊은이들을 기리기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상륙작전이 시행되었던 4월 25일은 '안작 데이'로 정해졌으며, 매년 같은 날 희생된 젊은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과거의 비극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희생된 군인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에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우리는 그렇게 가슴 아픈 역사가 잠든 도시에 삼일 간 머물며 이름 없이 죽어간 영혼들을 생각했다. 투어를 하며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묘지에도 방문했었는데 비석 위에 쓰인 그들의 나이가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나이를 속이고 자원입대한 마틴이란 병사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한창 꿈을 꿀 나이에 그 참혹한 전쟁터에서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글을 쓰는 지금도 그들의 고통이 들려오는 듯해 마음이 울렁인다.

<갈리폴리 반도의 작은 마을 에자밧. 그곳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

 타고난 풍요로움으로 역사상 꾸준히 부와 권력을 누렸던 터키는 그 화려함 만큼이나 수많은 전쟁의 역사를 품고 있다. 그런 곳을 여행하려니 공부가 반드시 필요했고 순수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한 배움은 고스란히 기억의 창고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세계를 여행하며 세상과 인생과 사람을 배우고 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가르쳐 준 적 없는 삶의 지혜를 배우며 자라 간다. 나이는 서른 밖으로 밀려났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살아도 살아도 어려운 공식처럼만 느껴지던 삶을 언젠가 술술 풀 수 있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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