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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할영 Dec 28. 2023

숭고한 빛을 뿜는 그녀들이 내게 다가올 때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 <흰 옷을 입은 여인>

자신을 향해 쓴 글에서 생겨나는 강한 빛이 있다. 그 빛의 힘은 시간이 지나 가리워져도 언젠가 다시 빛을 낸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쓸 수밖에 없어서' 쓴 글에는 자신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씨앗들이 숨어있다. 홀로 혹독한 세상을 견뎠기에 더 숭고해진 그 씨앗들은, 시간이 지나도 누군가 다시 꺼내어 빛을 내게 만든다.


우리가 그런 글들을 지금, 다시 불러와 읽는다는 건 내게도 그런 믿음과 사랑이 움트기를 기다리는 마음 때문 아닐까. 여기 그런 씨앗을 품은 작가들을, 그들의 글을 다시 불러온 책들이 있다. '사랑은 무한대이외다'에선 김명순을, '흰 옷을 입은 여인'에선 에밀리 디킨슨을 우리 앞에 불러온다.


김명순,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 핀드

'사랑은 무한대이외다'는 192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작가 김명순(1896~1951)이 1918년부터 1936년까지 발표한 에세이를 박소란 시인이 다시 정리한 모음집이다. 김명순은 나혜석, 김일엽 등과 함께 활동했지만 생소한 이름의 작가다. 1917년 '청춘'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소설가이며, 여성 최초로 작품집을 낸 시인인 데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번역해 국내 최초로 소개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이토록 다재다능한 그의 작품들을 보고 나면 왜 그의 이름이 이토록 희미하게 우리 문학사에 남아 있는지 통탄스러울 뿐이다.


이번 책에는 김명순이 쓴 총 19편의 에세이가 수록돼 있다. 산문 형태로 쓰였지만 깊은 사유가 응축돼 있어 시에 가깝게 읽히기도 한다.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이 짙게 배어든 글들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 세련되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플롯은 100년 전의 한 지성과 마주하는 놀라움을 선사한다. 특히 표제의 대목이 실린 작품 '사랑?'은 사랑이라는 막강한 힘을 지닌 채 자신만의 세계를 지탱해내는 한 사람의 숭고한 내면을 발견하게 해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크리스티앙 보뱅, <흰 옷을 입은 여인> / 1984books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은 '흰 옷을 입은 여인'을 통해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을 그려냈다. 1800편의 시 중 단 몇 편을 제외하곤 모두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에밀리. 보뱅은 그런 그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며 에밀리의 삶을 그렸지만, 읽다 보면 보뱅의 영혼이 깃든 것처럼 읽힌다. 시간의 논리를 벗어나 편편이 다른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에밀리가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지고, 우리에게는 무한한 사랑과 순수함으로 빚어진 그녀가 서 있다.


보뱅이 그려낸 에밀리는 '성자'에 가깝다. 어떤 사건도 부재한 일상을 갈고 닦아 아름다운 글로 만들어낸 그를, 보뱅은 "겸손이 그의 오만이며, 소멸이 그의 승리이다"라며 그의 비범함과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보뱅의 손끝에서 다시 우리 앞에 선 에밀리는, 더욱 강한 빛을 발한다. 그 빛은 안도와 평화를 주고, 나의 영혼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두 작가를 다시 데려온 책들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찌르는 곳마다 생긴 여백들에 어떤 씨앗을 심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내 빛을 꺼내게 만드는 그 글들이 내게, 우리에게 닿아서 스스로가 사랑으로 자신을 버티게 만들 힘을 내 주기를. 그 힘이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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