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어느 대학에서 ‘일상에서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독서만 한 것이 없다’고 강의할 때였다. 어느 남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저는 게임할 때 정말 최고로 몰입이 잘 됩니다. 시간을 잊는 데는 게임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게임을 마치고 나면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정신이 멍해집니다. 기분도 즐겁지 않습니다. 시공간을 잊고 몰입한다는 측면에서 게임과 독서가 비슷한 것 같은데 왜 몰입의 결과는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게임에 빠져드는 것은 ‘몰입’이 아니라 일종의 ‘탐닉’입니다. 어떤 것이 몹시 즐거워서 온통 마음이 쏠리는 것은 독서와 게임이 모두 같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릅니다. 독서에 몰입하고 나면 ‘어제와는 다른 나’, ‘보다 성장한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몰입의 즐거움이 독서가 끝난 뒤에도 이어지면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반면 게임은 어떤가요? 캐릭터는 레벨이 올랐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습니다. 게임 실력은 늘었을지 모르지만 그 실력이 현실의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몰입을 했습니다만, 독서에 들인 시간은 내 가슴에 뿌듯함을 남기고, 게임에 들인 시간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한 줌 재처럼 사라집니다. 뇌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차이를 알려주는 한 가지 실험이 있다. EBS에서 방영된 「과학카페 - 읽기의 과학」에서는 게임에 몰입된 사람과 책에 몰입한 사람의 뇌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었다. 일본 뇌과학계의 권위자인 모리 아키오 교수(니혼대학교)는 실험자의 머리에 128개의 센서를 부착하고 책을 읽을 때와 게임을 할 때 뇌의 움직임이 어떻게 다른지 관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독서할 때는 뇌가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두엽과 후두엽이 쉬지 않고 전기 신호를 주고받았다. 반면 게임하는 뇌는 극히 일부만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그 차이는 바로 상상(imagine)이다. 독서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글자를 읽는 동안 우리 뇌는 문자로 전달된 메시지를 영상(image)으로 전환한다.
예컨대 소설을 읽는 순간 우리는 영화감독이 된다. 작가가 쓴 스토리를 읽으면서 남녀 주인공을 캐스팅하고 소설 속 배경을 내 마음대로 그리며 장면 장면을 구성한다. 클로즈업도 해보고 롱 테이크도 찍어보고 배경 음악도 넣고 비도 내리게 한다. 영화에서는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지만 소설 속에서는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소설보다 못하다는 평이 많은 이유를 나는 ‘영화는 상상력을 제한하지만 소설은 상상력의 공간을 무한히 열어놓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같은 소설을 읽고 서로 다른 영화를 찍은 감독들이 있는 이유도 글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상상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상이 주는 즐거움은 그만큼 크다.
비단 소설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상상한다.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를 읽으며 우리는 그가 겪은 어려운 순간을 심호흡을 하며 함께 넘고, 다양한 여행서를 통해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는 이국의 땅을 다닌다. 수필을 읽으며 펜 속에 숨은 사색의 깊이를 느끼고,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내 속에 숨어 있는 보다 나은 나를 찾아낸다. 이처럼 책을 읽으면서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해 보자.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몰입할 수 있어서다. 그리고 독서하면서 몰입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상하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마음껏 상상하는 동안 우리의 뇌는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된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쉬이 늙지 않고 일반인보다 치매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연구결과는 괜한 게 아니다.
반면 게임을 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몰입의 경험은 다르다. 모니터의 화려한 영상을 쫓아가느라 우리 뇌는 상상할 틈이 없다. 무지막지하게 들어오는 영상 정보를 처리하기에도 너무 바쁜 까닭이다. 또한 게임은 머리를 아프게 해서는 절대 사람을 끌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이나 상상을 가로막는다. 자연히 뇌는 둔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게임 이후에는 가슴에 무엇 하나 남는 게 없게 되니 게임할 때는 몰랐으나 로그아웃을 하는 순간 피로감과 허무감이 갑작스레 밀려든다. 똑같은 힘을 썼더라도 트로피를 쟁취한 팀은 활기로 넘치지만 패배한 팀은 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