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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hyeon Mar 17. 2017

우리는 밤을 새고, 시를 찍다

- 이 제 니 편 -

해가 길어졌다.


 계절이 바뀌었다. 달력이 한 장 넘어갔고, 날이 제법 따뜻해졌고, 멀리 남쪽에선 꽃봉오리 소식이 전해져 온다. 나에게 무엇보다도 더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건 해의 길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깜깜했던 우리의 출퇴근 길이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모두의 모든 길이) 어느새 밝아졌다.


 그 날은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탓에 어떤 일과를 소화하려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내 귀갓길은 대부분 지하철을 타고 나와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식이다. 긴 겨울 동안 역 밖으로 나오면 늘 밤이었다. 5분이 1시간과도 같은 버스 정류장에서 언제나 달을 구경하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는 내 눈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내내 지하철의 새카만 터널을 보다 나온지라 잠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는 착각을 했으나 그건 노을이었다. 해가 기울어 역 밖으로 나오는 내 얼굴과 마주할 정도가 된 것이다. 



한낮의 반대편은 자정이다.

ⓒjuhyeon
두 눈을 감아도 햇빛은 가득하다. 너는 순도 낮은 네 잠을 감시하며 꿈속의 거리가 펼쳐지기를 기다린다. 한낮의 반대편은 자정이다. 자정과 정오가 바뀌듯 너의 몸은 조금씩 사라진다. 우리는 저마다의 겹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거리를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니, 「수요일의 속도」 중 일부.


 노을을 마주하다 뒤를 돌았을 때 거긴 옅은 달이 떠있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나면 더 짙어질 달이었다. 나는 해와 달 가운데 서 있다. 그 순간이 새삼 신비롭게 다가온다. 한낮과 한밤중은 반대다. 자정과 정오는 반대다. 해와 달은 반대다. 해 질 녘은 그런 해와 달이 공존하는 때다. 해가 지는 시간은 곧 달이 뜨는 시간이다. 진다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반대편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지금 다른 편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고작 몇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다시 그 반대편을 맞게 될 것이다.


ⓒjuhyeon


 반대편이라는 건 지구의 자전에만 쓰이는 말은 아닐 것이다. 흔히 반대라 하면 그 성질이 아예 다른 거라 생각하곤 한다. 때로는 틀리다고도 한다. 그러나 함께 서 있는 이 시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어떤 편이라도 서게 될 수 있다. 시인의 말따라, "우리는 저마다의 거리를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다." 


ⓒjuhyeon


 어느덧 구름이 해와 함께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간다. 이윽고 깜깜한 밤이 찾아오고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것이다. 그러나 두 눈을 감아도 햇빛은 가득하다. 다시 반대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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