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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밤 Mar 18. 2017

우리는 밤을 새고, 시를 찍다

'아름다운 평범함' 이제니 시인의 분실된 기록 중에서



 




 사는게 길다. 흐르는 매일을 비교적 섬세하게 대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길게 느껴진다. 우리는 매일 24시간을 강제로 선물받는다. 그걸 어떻게 쓸 지 이리저리 궁글리다가 하루를 다 보내기도 하고, 가끔은 다른 사람이 쫓는 걸 덩달아 쫓다가 퍽 엎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어서, 불 꺼놓은 방에 쪼그려 앉아 시원하지도 못한 눈물을 흘려보낸다. 좀 더 나아지고자 노력하지만 이상하게 영 뜻대로 안 되고, 낮은 머리 위가 답답해서 숨을 훅 내쉬어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하늘이 남들 머리 위 만큼 높아지지 않음을 깨닫고, 결국엔 덤덤히 익숙해지고 마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늘 공상하길 좋아했다. 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좋아했다. 앞으로 내가 할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이 좋았다. 무지막지한 잠재력과 심해보다 깊은 재능을 갖고 태어난 줄 알았으며, 더 나아가 반짝거리는 거국적 목적을 이룩할 계획 하에 태어난 사람인 줄 알았다. 현실을 살아가는 남들은 아예 그런 생각을 못 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고, 타협한 이들을 보면서는 이따금 비난의 목소릴 높여 날 그들과 구분짓곤 했다. 그게 낙이었으며 놀이의 전부였으니까.


 내가 스물 여섯이 되면서, 그 세상이 없어졌다. 갑자기 퍽 부서졌다기 보다 천천히 녹아 내렸다고 보는 게 더 옳았다. 더이상 꿈과 공상 속에서 마음껏 활개치며 살 수가 없다. 이건 내가 구축해 온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끽해야 남들이 알고서도 봐준 세상이었다. 아직 어려서, 아직 더 자라야 해서, 혹은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등등. 제각각 나름의 이유로써 내 세상을 지켜준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말이야. 멋쩍은 입맛을 다시며 자꾸만 손을 감싸쥐었다. 온 몸을 감쌌던 얇은 막이 부풀 대로 부풀어 올라 피상과 추상이 어그러져 버렸고, 더께를 걷어낸 시선 바깥으로 낯선 생동이 갑자기 나를 마주했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잎들은 눈부시게 흔들리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지금 순간의 안쪽에 있는 것인가.'

 


 그러던 차에 이제니 시집을 만났다. 가끔 그런 문장이 있다. 너무 평온한 일상을 그려서 당장 뛰어나게 다가오진 않는데, 이상하게 내 인생 전반에 스며들어서 나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살게 해줄 거라는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런 문장이. 위의 문장이 내겐 그랬다. 처음엔 평범한 그저그런 맥락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날 좋은 날 산책하다가 올려다 본 울창한 나무, 흔들리는 이파리 사이로 내려앉는 햇빛, 그게 반짝거리는 순간, 아름다움을 깨닫는.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배치된 그저 평온하고 평범한 문장.

 허나 별 생각 없이 지나친 문장 뒤로 자꾸만 질문이 줄줄 따라 붙었다. 다음 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자꾸만 나를 되돌려 놓곤, 자신을 수십번 곱씹게 만들었다. 눈부시게 흔들리는데 왜 아무 것도 아닌 채로 희미하게 매달려 있다는 걸까? 눈부심과 희미함이 함께 쓰일 수 있나? 두 가지가 공존하는 순간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 꾸밀 수 있을까? 순간을 안과 밖으로 나눌 수 있을까? 이 문장은 평범한 문장인가? 평온과 평범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일까?

 아. 파도처럼 커다란 감각- 너무 커서 한꺼번에 다 이해 못 할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나는 평온과 평범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구나. 별다른 기복 없이 유려하게 흐르는 일상이 의외로 갖기 어려운 것임을 간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채 희미하게 매달려 있는 이파리가,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눈부시게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구나. 평범은 슬프거나 재미없는 게 아니구나.





 고전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이 동경하는 친구 데미안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 문구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격언에 인용되며 많은 젊은이들에게 더욱 힘껏 노력해서 스스로를 깨뜨리고 나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 그거 좋은 메시지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게 있다. 정말 싱클레어는 자신의 세계를 깨뜨리고 나왔을까? 저 편지를 보내기 전까지의 싱클레어와는 아주 다른 스스로가 되어 신에게 무사히 날아갔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겪으며 자기를 깨뜨리는 대신 더욱 더 '싱클레어 그 자체'가 되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나'에게로부터 탈피하거나 도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받아들이고 껴안았다. 내게로 가는 길은 무수히 많기 때문에. 그거야말로 내 마음 속 우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시를 읽는다. 평범하게 흐르는 일상의 연속, 그걸 엮고 엮어가며 커다란 그림을 짜는 나를 떠올린다. 이따금 다른 일상이 섞여들어 새로운 패턴이 만들어지는 걸 바라본다.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모르던 평온함의 결을 손 끝으로 매만져 본다. 그렇게 내가 평범하고 흐릿하고,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 엄청 나 하나 뿐인 걸 깨닫는다. 어둑한 저녁, 강변 근처에 앉아 눈을 흐리게 떴을 때 보이는 빨갛고 주홍인 빛알갱이처럼- 없어도 잘 모르지만 있으면 예쁘고 좋을, 온전히 하나뿐인 나를 깨닫는다.

 몸을 털자. 타인이 멋대로 붙여 놓은 편린을 털어내자. 그건 스스로를 난해하거나, 슬프거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무거운 추일 뿐이다. 날 좋은 날 산책을 나가자.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시선을 들어 하늘 한가득 우수수 흩날리는 초록빛 이파리를 보자.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채 특별하게 매달린 나의 일상을 바라보자. 사이사이 빗금처럼 얽혀 내리는 햇살로 샤워를 하자. 바람결을 타고 일렁일렁 내려앉는 희미한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들자.  



 결국 사는 목적은 타인도 아니요, 타인이 그려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마음 한 가운데에 난 우물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웃음을 조금씩 떼 모아 만든 소소한 일상이 가장 특별하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평범함이다.








All rights reserved by. Hayan Bam.

Photographed by. Hayan Bam.

시구 인용 : 이제니 작가 시집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중 '분실된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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