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찍다 : PROLOGUE
시를 찍다 : PROLOGUE
2017 . 03 . 12 일요일
요즘 콘텐츠가 참 많다. 정신차리고 보면 핫하다는 베스트 셀러를 사고, 박스오피스 1위 영화를 예매하고, 소문난 전시회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소비 중심에 내가 없다. 누군가 정해놓은 '좋음'을 따라간다. 분명 삶을 살아가며 형성한 나만의 감성과 고유한 취향이 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그걸 소리 내어 말하는 데에 많은 눈치를 본다.
그렇다.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모르게 된다. 내가 지금 좋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 내가 좋아서 그렇다 하는 것일까? 타인이 “좋아요”를 누르고, 타인이 트렌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 역시 그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정말 우리는 다양성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
맞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콘텐츠를 감상할 때, 주변에서 말하는 대로 해석하고 그걸 비판없이 수용하려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많다. 이름있는 평론가의 평을 읽고 '아... 그런가?' 하며 넘어갈 때가 다반사다. 유명한 전시회를 관람하고 홀로 난해한 기분에 휩싸여 있는데 누군가 ‘그 전시회 어때?’ 라고 묻는다면 ‘어... 좋았어.’ 라고 대답할 때도 있다.
나는 사실 예술이 어렵다. 대중매체에서, SNS에서, 누군가 좋다하여 따라 소비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럭저럭 이해한 척, 좋다하고 만다. 그러고보면 “좋았다”는 말은 참 편리한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솔직해질 수 있을까? 좋았다면 왜 좋았는지, 싫었다면 무엇이 그랬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거다. '드는 생각을 주저말고 표현하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 눈치 보고싶지 않다. 누구의 눈치를 보고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체없는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 고민을 툭 털자. 모르면 모르겠다고 말하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표현하고. 모든 걸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 자체가 나의 감상이다. 거기서부터 ‘나'가 생긴다. 잔잔하게 서술된 책을 좋아하고, 비판적인 어조의 영화를 좋아하고, 메이저 코드보단 마이너 코드로 작곡된 음악을 좋아하는 등등.
대신 중요한 건, 그걸 바깥으로 표현해야 한다. 실천과 행동양식의 변화를 드러내야 한다. 다양한 감상과 의견이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는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며, 더 나아가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우리만의 감상법'을 담아낸 매거진을 시작하고자 마음 먹었다.
나만의 감상법을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이동진 평론가의 <밤은 책이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콘텐츠에서 어떤 한 장이라도, 한 문장이라도, 한 단어라도, 내가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대로 충분한 감상이라는 확신을 준다. 심지어 본래 내용과 전혀 상관없어도 된다. 어떤 영화에서 그냥 스쳐 지나는 대나무숲이 나왔다, 대나무숲과 관련된 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럼 그걸로 된 거다. 우리에겐 그 감상법이 바로 ‘사진’이다.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오면서,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았다. 글에서 함축적이고 감각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감성사진을 좋아한다. 감각적인 언어로 대표되는 장르가 ‘시’였고, 이는 감성사진과도 공통된 맥락이 있다고 여겼다. 오래도록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자꾸만 들여다보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갖게 만드는.
그래서 우리는 시를 읽고 떠오른 감상을 사진으로 표현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고, 솔직한 감상을 말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맞다. 더불어 우리 매거진을 읽고서 또다른 누군가 -표현의 욕구가 있는-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걸 주저 않고 시작하게 된다면, 그걸로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이런 생각이 비록 과유불급일지 몰라도 아무튼간 뚜렷한 목적과 단단한 자아를 기반으로 만들어나가는 콘텐츠엔 영혼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