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을 통해 서울을 돌아보다
원문
http://jaeminahyo.com/?p=20662
주 : 지난 2014년, '디자인 서울 뉴스레터'에 기고했던 글을 조금 다듬어, 브런치에 올립니다.
천경환 (이하 ‘천’) :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신논현역 22-011 (이하 ‘신’) : 응, 사람들은 나를 두고 보통 ‘강남역 버스 정류장 양재역 방향’ 정도로 부르는 모양인데, 내 정식 이름은 ‘신논현역 22-011’이야. 간단하게 ‘신논현역 버스정류장’이라고 해도 되겠지. 예전에 ‘교보타워 사거리 버스정류장’으로 불렸던 때도 있었지. “강남역에서 보자!”라고 할 때 사람들은 내가 자리 잡은 주변 동네를 떠올리는 것 같은데, 진짜 ‘강남역 버스 정류장’은 저기, 테헤란로 건너 남쪽에 있어. 나는 지난 2004년 7월, 서울시에 버스 중앙차로제가 도입되면서 태어났지. 지금의 모습으로 하나의 완벽한 자아로 정리되어 태어나기 전에는, 도로 가장자리 강남대로 서쪽 방면에 몇 개의 푯말들로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해. 아무튼, 내 몸에 연결된 횡단보도라든지, 중앙차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는 다른 버스정류장들이 나와 함께 태어난 형제자매들이야. 특히 바로 옆에 붙어있는 ‘신논현역 22-012’는 쌍둥이나 마찬가지야. 크기나 생김새는 거의 똑같은데 놓인 방향만 다르거든. 강남역에서 강북 방면으로 가려면 ‘012’에 가면 되고, 강남 방면으로 가려면 나에게 오면 되는 거야.
천 :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서 일상의 풍경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는데, 갓 태어나셨을 때에는 제법 큰 화젯거리였었다고 기억해요. 2004년이라고 했나요? 어때요? 그때를 돌이켜 보면.
신 : 사람들이 많이 신기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많이 낯설어하고, 또 불편해하기도 했지. 버스 중앙차선제가 정착되기 전에는 시행착오도 많았고, 불편도 컸고,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지. 처음 얼마 동안은 모든 버스들이 중앙으로 몰리면서 엄청난 교통 혼잡이 벌어졌었거든. 특히 나를 비롯한 근처 몇몇 ‘강남대로 형제자매들’이 대표적인 불편사례로 손꼽히면서, 티브이나 신문에 얼굴이 커다랗게 나오고 그랬었어. 내 주변에 버스들이 기차처럼 줄줄이 서있는 사진을 본 기억이 있을 거야. 충분한 예비 시험을 거치지 않고 성급하게 덜컥 도입해서 불편이 커진 거라는 주장도 있었는데,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길게 할 건 아니고. 아무튼, 부랴부랴 몇 개의 광역 노선들을 길가로 돌린다든지 하는 식으로 조정이 이루어졌고, 지금은 시스템이 무난히 정착되었지.
그때는 ‘버스 중앙차로제’라는 새롭게 도입된 제도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어서 내가 가진 매력을 뽐낼 여유가 별로 없었는데, 그게 지금도 아쉬워. 날씬한 내 몸매를 봐. 이래 봬도 내가 프랑스 출신이거든.
천 : 아이고, 그러셨어요?
신 : 그럼! ‘장 미셀 빌모트(Jean Michel Wilmotte)’라는 프랑스 건축가가 디자인한 몸이라니까! 파리에 있는 시내버스정류장들이 다 내 친척들이라고. 파리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봐. 교통량이 달라서 나보다 좀 짧은 애들이지만, 기본적으로 나랑 똑같이 생겼어. 참고로, 인천 국제공항에 세워진 안내판들도 같은 부모를 둔 내 형제들이야. 걔네들은 나랑 아주 똑같이 생긴 건 아니지만, 제법 많이 닮은 모습이지.
매일 봐서 익숙하다 생각하겠지만 한 번 자세히 봐봐. 늘씬하고 가뿐해 보이잖아. 지탱하거나 버텨야 하는 딱 그만큼의 두께와 크기로 설계되었기 때문이야. 쉽게 말해 군살이 없는 거지. 예를 들어 지붕을 받치는 팔의 경우, 지붕 끝으로 가면서 가늘어지잖아. 광고판을 지탱하는 받침대도 마찬가지고.
천 : 또 다른 자랑거리는 없나요? 외모에 대해서.
신 : 헤헤. 왜 없겠어? 각종 안내판이나 광고판, 벤치 같은 액세서리들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몸에 묶여서 함께 디자인되어있다는 것도 내세울 만 하지. 벤치나 안내판은 따로 사서 옆에 세우는 식으로 디자인하면, 아무래도 촌스럽고 어수선해 보이기 쉽지.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일 때 방해가 될 수도 있어. 벤치가 내 몸에 어떻게 붙어있는지 잘 봐봐.
천 : 같은 색깔에 같은 재료로 한 몸처럼 붙어있어서 보기에 깔끔하네요.
신 : 그리고, 이게 내 허리에 매달려있다고. 자기 다리로 서 있는 게 아니라, 내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려있거든. 덕분에 벤치 아래 공간이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뚫려있고, 짐이든 발끝이든, 넉넉하게 넣어둘 수 있는 거지.
천 : 그렇네요. 자랑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 발로 지탱하지 않고 허리에 매달리는 식의 구조를 ‘캔틸레버(cantilever)’라고 부른다는데, 커다란 광고판도 그렇게 붙어있네요.
벤치처럼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눈에 잘 띄는 것도 아니지만,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일관된 이미지 연출에 도움을 주고 있겠지요. 뼈대에 조명이 붙어있는 방식도 인상적이에요. 뼈대에 스며들어 가듯, 깊숙이 박혀있네요. 조명은 뼈대와 한 몸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유리는 뼈대와 완전히 별개의 독립된 요소로 고정되어 있네요. 이런 작은 표정들이 쌓여서 전반적으로 가뿐한 인상을 연출하고 있나 봅니다.
신 : 그렇지. 그런 거야. 제법 이해가 빠르군.
천 : 그러고 보니 주변의 담장이나 가로등 또한 선생님 몸이랑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네요.
신 : 알다시피 서울이 얼마나 어지럽고 난잡해. 서울은 나이가 600년이라고 하지만, 사실 지난 수 십 년 동안 들쭉날쭉 서둘러 만들어진 도시라 볼 수도 있어. 그런 도시에서 건물의 표정을 가지런하게 통제하기는 힘들겠고, 대신 가로등이나 버스정류장, 차로 분리대 등 공공 시설물들의 생김새를 최대한 일관되게 연출하는 거지. 그렇게 해서 거리 풍경을 정돈하는 거야. 거기에 내가 큰 힘을 보태고 있는 거라고. 그걸 알아주었으면 해.
천 : 그렇군요. 감사해요. 그런데, 2004년에 태어나셨다고 했는데, 올해가 2014년이니까, 벌써 10살이 되었네요.
신 : 그렇지.
천 : 음. 그런데, 왜 저에게 반말하세요? 나이는 제가 훨씬 더 많은데.
신 : 그야, 뭐. 나는 덩치도 크고. 사람이 아닌 가상의 존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글쓴이 입장에서 내가 이런 말투 쓰는 게 편할 테지. 이제 와서 존댓말 쓰기도 이상하잖아. 불만 있나?
천 : 아, 뭐. 좋아요. 그런데, 갓 태어났을 때랑 지금을 비교해 보면, 바뀐 부분도 있죠?
신 : 응. 새롭게 덧붙여진 것들이 있지. 곧 도착할 버스를 알려주는 전광판 같은 것은, 한국이 자랑하는 아이티(IT) 기술의 성취를 입증하는 거야. 버스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전광판 덕분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좀 더 여유롭게 기다렸다가 원하는 버스를 탈 수 있게 되었지. 전에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우르르 뛰어다니느라 난리도 아니었다고. 그리고 전광판이 설치되면서 나는 비로소 내 목소리를 갖게 되었지. 전광판 알림과 함께 “몇 분 뒤, 아무개 버스가 도착하겠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목소리 때문에 비로소 내가 사실은 젊은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천 :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신 : 내 이름(22-011)이 커다랗게 쓰여 있는 것도 이유가 있지. 스마트폰 어플에 입력해서 버스 이동 관련 정보를 검색할 수 있거든.
아무튼, 서울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생기고, 뭔가가 바뀌고. 몇 달 전이었나,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인도와 버스가 서는 차로 사이 경계 바닥에 조명을 붙이더라고. 아직은 정확히 어떻게 작동될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은근 기대가 돼. 내가 어떻게 더 멋있어질까, 가슴이 두근두근해.
천 : 서울은 유명한 최첨단 도시죠. 우리는 당연히 여기는 것들을 두고 외국 친구들은 깜짝 놀라기도 해요.
신 : 연말에는 내 머리 위에 화려하고 예쁜 장식물을 씌우기도 하더라고. 기업 협찬을 받아서 광고를 겸한 장식물을 올리는 거야. 이런 역할도 사실은 내가 막 태어났을 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지. 아무튼,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에 내가 작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해지더라고. 사람들이 은근히 즐거워하는 게 느껴지기도 하고.
천 : 선생님의 등장으로 거리를 거닐거나 횡단보도를 통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체험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신 : 응. 그런 측면에서도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되더라고. 나는 보행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어. 보행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서 자동차를 좀 더 만만하게 대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해. 강남대로가 왕복 10차선이야. 폭이 40미터에 육박하는 큰길인데, 쉬지 않고 단번에 건너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거리지. 쉼표 없이 긴 문장을 단번에 읽으려면 힘들잖아. 긴 문장을 여유롭게 읽게 하려면, 쉼표를 찍어야 해. 나는 강남대로 한복판에 놓인 쉼표야.
천 : 과연 그렇군요!
신 :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상황을 상상해봐. 40미터 너머의 사람들은 자세히 보이진 않아. 윤곽만 얼핏 보일 뿐이지. 그런데, 20미터 너머 내 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제법 잘 보이거든. 미세한 표정까지 잘 보이고, 그래서 모르는 사이에 어떤 교감이 오간다고.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게 되는 거야. “기다렸다가 신호가 바뀌면 함께 나와서 차로를 점령하자!” 정작 본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겠지만, 그리고 겉으로는 마치 서로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 거라고. 내가 만들어지면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이 한결 만만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해. 나 덕분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호흡이 짧아졌고, 횡단보도 설치 간격이 좀 더 촘촘해졌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황량했던 강남대로의 공간 느낌도 잘게 쪼개지면서 한결 아늑하게 되었지.
나와 내 쌍둥이 ‘신논현역 22-012’ 언저리에 연결된 몇 개의 횡단보도들에서 보행신호가 떨어졌을 때, 일제히 사람들이 차로로 쏟아지는 광경을 보면 정말이지 장관이야. 넓은 강남대로 차로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한 광장으로 바뀌는 모습! 횡단보도가 촘촘히 놓여있고, 신호가 동시에 떨어지다 보니,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차로의 영역이 생기는 데에 묘미가 있어. 차로 위를 사람들이 막 걸어 다니는 모습도 인상적이지.
천 : 그러고 보니, 지난 몇 년 새 강남대로의 풍경이 많이 활기차게 바뀐 것 같아요.
신 : 많은 분들이 “서울은 보행자에게 친절한 도시가 아니다. 서울은 자동차의 도시다.”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옳은 지적이지. 내가 비록 버스정류장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걷기 편한 도시가 좋은 도시 맞아. 서울은 좀 더 보행자를 위한 도시가 되어야 해. 서울을 보행자의 도시로 만드는 데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있는 거라고.
천 : 강남대로 동쪽(강남구) 상권과 서쪽(서초구) 상권이 하나의 상권으로 좀 더 밀접하게 이어지게 되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분리된 상권이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연결된 상권으로 발전하고 있는 듯해요.
신 : 글쎄,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봐주면 고맙지.
천 : 예전에는 동쪽 블록에서 만나면 계속 그 언저리에서 놀았었는데, 요즘에는 동쪽 블록에서 놀다가 재미없으면 곧잘 서쪽 블록으로 넘어가서 놀기도 하는 등, 동쪽과 서쪽 블록이 좀 더 가깝게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뭔가 느낌이 달라졌겠지요?
신 : 응, 내 주변을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곧잘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천 : 자동차랑 이야기를 해요?
신 : 뭘 그리 놀라? 버스정류장이랑 자동차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신기해? 서로 소통이 안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야?
천 : 저희 사람들끼리도 소통이 잘 안 되어 걱정인데, 자동차와 이야기를 하신다니 신기하고도 부러워요.
신 : 이 정도로 그렇게 놀라워하다니. 아무튼, 자동차들이 가끔 나에게 하는 말이, 나를 의식하면서 운전자들이 태도가 확실히 조심스러워졌다는 거야. 바로 옆에 자동차가 아닌 커다란 광고판이 서있고, 또,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있으니까. 자동차를 위한 황량한 간선도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다니는 골목길을 지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게 된다고 하더라고.
차가 막혀서 오랫동안 정지해있어도 지루함이 덜 하다는 말도 있고. 아늑하고 오밀조밀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는 운전자들도 있다니, 나 또한 흐뭇한 일이지.
천 : 말씀을 듣고 있자니, 선생님 덕분에 거리의 풍경이 여러 측면에서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됩니다. 앞으로의 변화 또한 기대됩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 해 주시지요.
신 : 서울은 정말이지 역동적인 도시야. 살기 험하고 무뚝뚝한 도시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 의외로 많은 배려가 심어져 있거든. 새로 만들어지는 것들도 많고, 의견을 받아서 업그레이드되는 속도도 빨라. 바로 나처럼 말이야! 열심히 사느라 바쁘겠지만, 가끔은 주변을 돌아보고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해. 이유를 상상하고, 작동방식을 이해하고, 효과를 살펴보기를 권해. 그만큼 서울이라는 도시를 조금이라도 더 잘 활용할 수 있게 되겠지. 그리고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사용하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면 인터넷으로든 전화로든, 그때 그때 말해주면 더 고맙겠어. 아무래도 칭찬받으면 신나고 힘이 나겠지. 그리고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면, 도움이 되는 쪽으로 바뀌고 싶은 마음도 커.
천 :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역할 해주시길 기대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 '신논현역 22-011' 님과의 인터뷰는 내내 유쾌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아서 그동안 갑갑했는지, 살짝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울에는 '신논현역 22-011'님 말고도 아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다른 많은 분들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독자 여러분의 참여와 제보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