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과 비상계단
주 : 오랫동안 다듬어 온 원고를 조금씩 풀어놓습니다.
감각(感覺) : 외부 또는 내부의 자극에 의하여 일어나는 느낌. 사물을 느껴서 받아들이는 힘.
/ 네이버 한자사전
어느 날 익숙한 건물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건물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빛, 바람, 소리, 온도, 습도 같은 건물을 둘러싼 ‘현상’(現象, phenomena)이 변했고, 그 변화가 건물에 비쳤기 때문이다. 건축은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워서 세상을 조금 더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때 건축을, 현상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배경’ 또는, 몰랐던 현상의 변화를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라 부를 수 있다.
허드슨 강변에서 흥미로운 풍경을 발견했다. 강물 위로 수 백 개의 말뚝들이 살짝 솟아 나와있는 모습이었다. 근처 안내판을 보니 옛 선착장(pier)의 흔적이라고 써 있었다. 배가 아직 유력한 교통수단이었을 시절, 허드슨 강에는 수많은 화물선과 여객선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그 배에 오르내리기 위해 필요한 선착장들 또한 많았다. 그런데 비행기나 자동차 등 다른 교통수단들이 발달하면서, 배는 예전만큼 널리 쓰이지 않게 되었다. 함께 쓸모가 없어져 버린 선착장들 중 일부는 창고나 레스토랑, 쇼핑몰 등으로 용도가 바뀌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해체되었다. 결국 굳이 힘들게 뽑아낼 필요가 없는 말뚝들이 피어(pier)라는 이름과 함께 흔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옛 선착장의 흔적은 지나간 역사와 변해버린 시대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무런 구체적인 기능을 하지 않은 채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만으로 도시는 보다 두툼한 시간을 품을 수 있고, 좀 더 입체적인 이야기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만으로도 인상적이다. 단순한 요소들이 끝없이 반복되며 일상을 뛰어넘는 스케일로 늘어선 모습은, 의미나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런데 정말로 재미있었던 것은 말뚝으로 물결의 움직임이 읽힌다는 사실이었다. 키 작은 말뚝들은 흔들리는 물결에 잠시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내밀고 또다시 물결 속으로 잠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코 앞의 말뚝들이 머리를 내밀고 저 너머 말뚝들은 강물 속에 잠겨 있었는데, 어느 순간 코 앞의 말뚝들이 잠겨 있고, 저 너머 말뚝들이 머리를 내미는 식이었다. 넓게 늘어선 말뚝들이 다가오는 물결의 리듬을 각각 감당해내고 있었기에, 눈 앞에 펼쳐진 지형이 마구잡이로 꿈틀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덕분에, 흘러가는 강물의 물결이 어떤 식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는지, 그 입체적인 움직임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결이,
얼마나 넓게,
얼마나 깊게,
그리고, 얼마나 자주 출렁거리고 있었는지를.
그렇다. 말뚝이 없었다면 물결을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하늘과 맞닿아서 꿈틀거리는 표면의 움직임 만으로는, 또는 가까이에서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물결들이 연신 서로 싸우듯 겹쳐지는 모습만을 통해서는, 물결의 구체적인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말뚝 때문에 물결이 읽히는 것인데, 그렇다고 말뚝이 없었던 물결을 새롭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움직임 없이 늘어선 말뚝들 덕분에, 늘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던 강물의 구체적인 움직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뉴욕에서 인상 깊게 본 또 다른 것이 ‘비상계단’이다. 맨해튼의 곳곳에서, 특히 챌시(Chelsea)나 소호(Soho) 같은 낡고 낮은 건물들이 밀집한 동네에서, 건물들의 얼굴마다 철제 비상계단이 붙어있는 모습을 곧잘 볼 수 있었다. 요즘 건물을 지을 때에는 이런 계단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재에 견뎌낼 수 있는 건물의 성능이 지금과는 달랐고 그래서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는 조건이 달랐던, 예전의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이다.
얇은 금속 판을 짜 맞추어 만든 계단들이었다. 빗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햇볕이 가려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순수하게 실용적인 요구에 맞추어 디자인된 것들인데, 사뭇 인상적인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고, 의도하지 않았을 기대 이상의 여러 효과들이 생기고 있었다. 건물의 얼굴에 덧씌워진 계단은 딱딱하게 경직된 표면을 부드럽게 풀어주면서 거리를 향해 드러나는 건물의 표정을 좀 더 ‘폭신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팽팽하게 얼어붙은 듯한 건물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계단과 난간들은 건물에 견주어 사람 몸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사람의 움직임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건물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면서 건물과 거리를, 건물과 사람을 가깝게 이어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단은, 건물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섬세한 부품들로 가지런하게 조립된 구조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 시각적인 효과 만으로도 마치 예술 작품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정말로 흥미로웠던 것은 그림자로 인해 햇볕의 움직임이 읽힌다는 사실이었다. 그림자의 크기와 방향, 그리고 흐리거나 또렷한 정도를 보며, 계절과 시간, 날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강바닥 깊숙이 박힌 선착장 말뚝들 덕분에 강물의 구체적인 일렁임이 드러난 것처럼, 벽면에 단단히 고정된 피난 계단 덕분에 늘 뜨고 지며 세상을 비추던 햇볕의 구체적인 움직임과 표정이 실감 나게 드러난 것이다.
짧은 기간 뉴욕에 머물면서 겪었던 이 두 가지 풍경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건축의 부정할 수 없는 원초적인 속성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속성은 다름 아닌 ‘어느 한 장소에 고정되어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 천년 동안 습관처럼 굳어진 당연한 정체성이자, 기술의 발전과 생활상의 변화에 의해 극복되기를 요구받고 있는 낡은 고정관념이다. 하지만 앞으로 한참 동안은 충분히 유효할, 건축의 원초적인 운명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현상’(現象, phenomena) 속에서, 건축은 한 곳에 단단히 고정된 채,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다른 것들에 비해 한결 느린 속도로 늙어간다. 변화는 변화만으로는 잘 읽히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무엇을 배경 삼아 일어날 때 변화는 보다 생생하고 각별하게 그 내용을 드러낸다. 어느 날 익숙한 건물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건물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빛, 바람, 소리, 온도, 습도 같은, 건물을 둘러싼 ‘현상’이 변했고, 그 변화가 건물에 비쳤기 때문이다. 건축은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워서 세상을 조금 더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때 건축을 현상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배경’, 또는, 몰랐던 현상의 변화를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라 부를 수 있다.
전에 없던 기발한 것을 새롭게 ‘발명’하기 보다는,
익숙한 것들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해내고 싶다.
‘늘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즐거움을 일깨워주고 싶다.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디자인을 대하는 나름의 태도이자 지향점이었다.
말뚝과 계단은 이런 생각과 통하는 장면들이기에 인상 깊게 남았던 것 같다.
그래서 개인사업을 시작하면서 만든 명함에 선착장 말뚝 사진을 집어넣기도 했다.
말뚝이 물결을 드러내고 계단이 햇볕을 드러내는 것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어떤 무언가를 드러내는 건물을 만들고 싶은 마음.
건물 못지않게, 건물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무언가를 통해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건물을 만들고 싶다는 다짐의 표현이었다.
그렇다. 계단은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는 햇볕의 구체적인 표정을 드러낸다. 그런데 거꾸로, 햇볕이 만들어낸 그림자로 인해 계단의 구체적인 생김새가 낱낱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너무 자잘하고 섬세해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던 계단의 얼개가 길쭉하고 두툼하게 일그러진 그림자로 인해 속속들이 훤하게 드러나고 있다. 몇 개의 얇은 쇠창살이 어느 방향으로 늘어서서 한 개의 디딤판을 이루고 있었는지, 계단의 디딤판과는 다른 방향으로 또 다른 창살들이 모여서 계단참을 만들고 있었는지,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건물이 현상을 드러낸다.
현상이 건물을 드러낸다.
두 관점 모두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다. 동전의 앞 뒷면처럼 서로가 서로의 이유이자 결과가 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맞물리는 구조의 이야기이다. 따지고 보자면, 오히려 현상이 건물을 드러내는 것이 먼저였겠다. 현상이 없었으면 건물의 존재 여부도 몰랐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어느 편이 먼저였는지, 어느 편이 원인이고 어느 편이 결과인 것인지, 뚜렷하게 가려내는 것이 별 의미도 없을 때가 많다. 어쩌면 바라본다는 것은, 관찰한다는 것은, 현상과 대상(건물)이 서로 한창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한참 대화에 열중인 둘을 두고 누가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었었는지를 이제 와서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두번째 조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