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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May 06. 2023

먼 나라에서 도래한 우리의 이야기

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 을 읽고.

 1917년 겨울 평안도 깊은 산속. 극한의 추위 속에서 굶주림과 싸우며 짐승을 쫓던 사냥꾼이 호랑이의 공격으로부터 일본인 장교를 구하게 되는데, 이 만남으로 그들의 삶은 운명처럼 연결되고 반세기에 걸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냥꾼, 군인, 기생, 깡패, 학생, 사업가, 혁명가…… 파란만장한 인생들이 '인연'이라는 끈으로 질기게 얽혀 만나고 헤어지고 재회하며 한반도의 역사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작은 땅의 야수들≫은 분량이 600페이지나 되는 장편 소설이다. 소설에서 다루는 시기도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의 근현대까지 어언 50여 년이나 되는 거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아마존 '이달의 책'에 선정된 바 있고 전 세계 12개 이상의 국가에 번역 출간되었으며 '22년 데이턴 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한 이 소설은 한국계 미국인인 작가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루었다는 점 때문에 제2의 ≪파친코≫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파친코≫는 아직 보지 않은 터라 두 작품을 비교하기보다 이 작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저 혼란스러운 시대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으며 살아가는 주인공은 기생 옥희와 (어렸을 때는 거지였던) 깡패 정호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 둘을 중심으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모여 격동의 반세기를 살아간다. 사냥꾼과 호랑이, 남자와 여자, 어머니와 기생, 부모와 자식, 부자와 가난한 자,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독립군과 일본군 장교, 조선과 일본, 남과 북 ……. 작가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소속, 가치관, 직업과 상황, 국가관을 상징하는 이들을 대칭점에 배치함으로써 혼란스럽던 시대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이들이 서로 대립하고, 협력하고, 갈등하고, 사랑하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결국 우리 민족이 살아온 역사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나 근현대에 친숙하지 못했을 미국의 독자들을 위해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그 시대를 설명해 낸 작가의 영리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처럼 잘 짜인 구성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작가와 번역가의 유려한 글솜씨다. 현대 한국인에게도 낯선 우리의 근현대사를 영어로 먼저 풀어내고 그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임에도 어색한 부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는 장면이나 상황, 등장인물들의 모습이나 감정 등을 매우 공들여 묘사한다. 보통 하나의 장면에 대한 묘사가 과하면 속도감이 떨어져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 각 장면이 생생하게 머리에 그려진다. 이 같은 섬세한 묘사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옥희와 정호가 처음 만나는 장면의 묘사를 보고 있자면, 왜 그 순간의 정호의 삶에 평생토록 각인되었는지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야수가 생존 본능에 따라 움직이듯 이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누군가는 신념이 비틀려 있고, 또 누군가는 시대에 휩쓸리다 보니 생각이 바뀌어 버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국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배신이 될지라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책 뒷 표지에 수록된 "빌어먹을 전쟁 따위도, 외로움 같은 것도 다 엿이나 먹으라고 해. 계속 살아남아."라는 말은 혼돈의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작은 땅의 야수들 모두를 꿰뚫는 삶의 행동강령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시대의 비극과, 그 비극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야수들의 틈바구니에서 주인공들을 살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주위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들에게 받는 사랑. 이런 사랑들이야 말로 자신을 살게 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옥희는 이렇게 되뇐다. 그리고 이 말이야말로 작가가 600페이지나 되는 분량을 들여 반세기라는 세월을 풀어내면서 꼭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에.


 

 세상을 뒤흔들어 버리는 너무나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한 개인의 삶은 작고 무기력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개개인은, 어떻게든 그 시대를 살아내야 한다. 고통과 고난이 수없이 찾아오더라도 각자가 품은 삶의 가치와 용기,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 '그래도 삶은 살만한 것'이라고 느끼게 되는 날이 올 테니.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 찾아온 고난과 고통의 시대를 야수처럼 살다 간 우리네 이야기. 김주혜의 장편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이었다.






# 기억에 남는 문장들


"인간의 마음이란 어두운 숲과도 같아서, 야마다처럼 이성적인 남자도 내면에 그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담아두곤 한다.” (33p)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나오는 것보다 신나는 것도 없거든. 슬플 땐 그걸 기억하렴." (102p)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250p)

"최근 몇 년 동안 야마다 대좌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자신이 느껴야 하는 감정이 종종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혹시나 그게 자신을 방래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취약점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그는 스스로의 의지력을 시험하고자 내심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의도적으로 해나가는 습관을 들였다." (273p)

"우리 모두 합리적인 이유 없이 그냥 사랑에 빠지고 마는 것들이 있잖아요. 사실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진짜 사랑이 아니기도 하고요.” (371p)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용감한 거지." (429p)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에.” (6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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