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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reader Apr 07. 2022

봄날 ; 서럽게 눈부신


그날, 전국의 민영방송사가 모이는

시상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개월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온 행사는

이제 막 카운트다운에 들어갔고

담당 작가였던 나는 몇 시간 전 새벽,

최종 대본을 넘겼었다.

모처럼 평화로이 쪽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것도 잠시.

날카로웠던 전화벨.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잠결에도 인지된 비상이었다.

 

그날, 그렇게 아이들을 품은 배가 가라앉았다.

 

스태프들 모두 뉴스 속보에 눈을 떼지 못했다.

사무실 한쪽에선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여기저기 탄식하는 소리.


전국 방송사 대표들의 긴급회동이 있었고

곧 방송축제는 취소되었다.

실종된 아이들이 너무 많은 비상 상황에

공중파 방송이 축제를 벌일 수는 없었으니까.


통보를 받자마자 수상 예정자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하루를 보냈다.

수화기 너머의 그들도 이미 예상한 듯

공중분해된 시상식에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개월 준비해 온 방송이 공중분해되었지만  

그날만 방송 따위가 문제 아니었다.

돌아오지 못할 아이들의 숫자가 커져갈수록

수화기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을 것이다.

복잡해진 상황을 수습하면서도

눈은 속보 모니터를 향해있었다.


마치 슬로모션처럼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우린 모두 누군가를 잃으며 살아간다.

유한한 삶임을 각오하고 달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되지 않는 죽음이 있더라.

시간에 떠밀려왔어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목놓아 울게 하는,

잊히지도 잊어서도 안될 소멸이 있더라.

 

준비 안된 이별은

두고두고 천천히

남겨진 자들의 삶을 조여 온다.

길을 가다 문득,

밥을 먹다 문득,

예고도 없이 숨조차 쉴 수 없는 폭풍 되어 휘몰아친다.

하물며 이토록 아까운 청춘의 소멸이야.

 

남겨진 자들은 울어라도 볼 일이다.

그것이라도 해야 살아낼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하필, 서럽게 눈부신 봄날이었다.

 

다시 벚꽃 흐드러진 봄날,

90을 눈앞에 둔 아빠가 죽마고우들의 방문에 모처럼 환해졌다.

고등학생 아들도 봄꽃 만개한 교정에서

기숙사 친구들과의 사진으로 

잘 없던 안부를 전해왔다.

고단한 입시 지옥 속에서도 나름의 추억을 만드는 청춘들을 흐뭇해하다가

문득 가라앉은 아이들을 떠올린다.

함께 커피를 마시던 스물다섯의 조카가

배에 탄 아이들이 동갑내기였다고 말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구나.

그럼에도 제자리에 멈춰버린 상처.


다음 주면 벚꽃이 진 자리에

노란 리본이 흩날리겠구나.

눈부셨을 새끼 잃은 어미는, 아비는,

봄날을 어쩌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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