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을 찾거나 만드는 사람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고

by 여노

우리는 얼마나 더해야 익숙해질 수 있는가. 유능과 무능 사이에서 나의 “쓸모”를 입증해야 하는 굴레에서 정처없이 헤맨다. 어제는 괜찮았어도 오늘 실패하거나, 오늘은 괜찮았어도 내일 실패할 수 있다. 보다 단순한 일을 했다면 달랐을까 자문하지만 이 물음 이면에는 오만이 있다. 우리는 ‘입증’이 불필요한 일을 그다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 데에 익숙하다. 직업에 귀천이 어딨느냐고 말하지만 그때 언급하는 직업을 기피하는 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니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저자인 브링리가 “한번씩 당신은 경비원 따위일 뿐이라는 걸 아주 확실하게 상기시켜주는 녀석들을 겪지 않고서는 경비원으로 일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모욕을 피하고 싶어서, ”그 따위 일“은 맡고 싶지 않다. 정말로 그 일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모욕을 당면해야 하는 순간에 무너지는 내가 두려워서. 그럼에도 파란 유니폼에 감춰진 누군가의 꿈과 열정을 말하는 책이다. 그래서 원제 그대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당신이라고 말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지적 허영은 물론, 자신이 우월함을 인정받고픈 욕망까지 채워주는 공간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예술작품이 드러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때론 느끼며 경탄하고 멈춰선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브링리도 그런 사람이다. 그가 보기에, 예술작품은 “내밀한 것들”을 다루면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진리를 들춘다. 예술작품이 드러내는 진리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뻔한 것들, 간과하고 지나간 것들을 돌아보도록 일깨워”주는 것이고, 대개 인간은 죽는다는 진부한 사실이다. ‘메트’에서 전시하는 작품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육체노동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과정에는 온갖 불만과 ‘무한한 근면성’이 깃들어 있다.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체감하는 고통에서 비롯된 ‘아름다움.’ 고상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관람하며 “5분만”을 외치던 ‘신사’와 내내 서서 주위를 돌아보며 일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는 ‘귀족적’ 노동을 하는 경비원 중 누가 고통과 아름다움을 보았을까. 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작품이 드러내는 ‘사물의 진리’는 실존적 물음을 던지는 인간만이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책 속에서 브링리의 시선을 통해 숭고하거나 평범한 아름다움을 보지만, 모두 일정한 심사를 거쳐 ‘적격하다’ 판정된 사물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것이 아름다운 것인가’ 생각했다. 세간의 인정을 받아야만 자격을 얻는 예술작품이 미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적 가치가 있기에 발굴되어 자리가 마련된 것일까. 무엇이 순서인지는 알 수 없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시작은 초라했다지만 이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권위 있는 장소가 되었으니까. 진정 예술작품이라면 그 미술관에 전시될 것 같고, 메트에 전시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작품이 될 것만 같다.


흥미롭게도 책이 언급하는 작품은 대부분 죽은 예술가의 작품이거나 로레타 페트웨이처럼 불평 가득한 작가의 작품이다. ‘숭고한 열정’ 따위로 완성하지 않은 작품을 젠체하며 바라보는 이들이 모지리로 보이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삶의 고통을 처절하게 파고든 사람들이 남긴 작품을 바라보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들. 브링리가 살짝 보여준 파란 유니폼 아래 창조적 자아가 궁금하다. 저마다 속사정이 있다. 허구는 실재보다 다정하다. 살아있는 인간으로 마주하는 세상은 상상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때론 지나치게 잔혹하고 무심하다. 브링리는 “때때로 삶은 단순함과 정적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다”고 했는데, 그런 순간이 정말 있다면, 그 순간 낙원이 도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브링리는 ‘사회적 인정’이 보장된 직업에 종사하다가 형인 톰의 죽음으로 텅 빈 마음을 미술관에서 채웠다. 그는 다음 여정을 준비하며 동료들의 축하 속에서 아름다움이 드리워진 파란 유니폼 세상을 우리에게 알렸다. 그가 언급한 무수한 세계관과 작품이 있어도 기억에 남는 것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다. 총알 8발을 맞고서 미국으로 망명온 조셉이 어깨를 으쓱하며 단조롭게 뱉은 말이 맴돈다. “살아있고, 가족이 있고, 양심을 잃지 않았으니까.” 아. 우린 살아있고, 서로가 있고, 양심이 있구나.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라면, 미술관을 방문하지 않아도 좋다. 자기 존재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면서도 “군말없이 살아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니까, 우리가 만든 작품이 모인 곳도 삶의 미술관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브링리가 그의 소망대로 다시 메트로 돌아가길 바란다. 나는 돌아갈 장소를 찾는 대신에, 우리가 함께 걸은 모든 골목을 미술관으로 꾸며야겠다.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