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의 번잡함과 편리함과, 그 사이에서 진자 운동하는

-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를 읽고

by 여노

새천년의 시대가 온다면서 모두가 “밀레니엄”을 입에 올리던 때가 있었다. 미디어가 그리는 미래는 은빛 머리칼에 비닐이 연상되는 옷차림의 사람들이 묘한 전자기기로 소통하거나, 인간을 본 딴 이미지가 가득한 세상이었다. 영화 <매트릭스>가 개봉된 이후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개념이 주목 받으면서 사람들은 원본이 없는, 진짜 같은 가짜를 이해하고자 머리를 싸매곤 했다. 이 세상은 많은 영감을 주었으나 여전히 먼 미래처럼 아득했었다. 그리고 ‘지금’이 되었다. 고종석이 『코드 훔치기』에서 전망한 대로 변한 일상을 마주하면서 기시감을 느낀다해야할지, 아니면 문제였던 것이 여전히 문제라는 데서 낙관적 전망을 거둬야할지 망설인다. 그가 자주 언급하는 자크 아탈리의 이름을 볼 때마다 “나도 자크 아탈리 좋아하는데!”라며 그저 공감하는 것으로 그치자니, 자크 아탈리가 『그래도 당신이 옳다』에서 말한 책임지지 않고 요구하기만 하며 분노하는 이들이 눈앞을 스치면서, “해 줘”라는 말로 일축되는 모종의 행태가 내 머릿속을 강타한다.


세계화가 국제화를 밀어내면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문화가 산업으로 자리 잡자 커지는 시장을 발판 삼아 우리의 취향도 ‘하나’가 되었고, 가치관도 ‘하나’가 되었고, 일반적 양상은 보편적 진리가 되어가며 ‘하나’가 되는 기류에 동참하고자 발버둥 쳤다. 이 기류는 때때로 ‘부동산 열풍’이나 ‘비트코인 열풍’ 따위로 불렸으며, 세속적 가치가 무엇인지 자문하기도 전에 ‘돈이 전부다’라는 기이한 신념만이 확고하게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신용을 매개로 하는 블록체인 기술이 보여준 중앙통제기관이 없는 암호화화폐의 가능성은 단지 투기를 위한 입발림으로 대중에게 다가갔으며, 21세기가 도달하기 전에 이미 시도되었던 가상세계는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단어로 또 다른 투기를 부추겼다.


고종석이 책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국제화가 국경을 염두에 두는 것과 달리 세계화는 ‘하나’이길 재촉한다. 그래서 더욱 다수의 여론에 취약하고, 나 또한 고종석처럼,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공화주의적 면모가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공감할 따름이다(고종석이 필립 페팃을 알았더라면 분명 그를 언급했으리라). 책임 있는 공민이 되는 것, 이 일은 정치적 목적으로 재배치된 이미지의 향연만이 가득한 ‘텔레크라시’ 때문에 쉽지 않은 듯 하고, (그의 지적처럼) 원본이 없는 모핑 이미지가 만연해진 탓에(딥러닝 기술에 기반한 딥페이크 기술이 대표적이다) 난관만 그득한 듯도 하다.


고종석은 감시 카메라가 우리를 둘러싼 ‘유리벽 속에 사는 우리’를 말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기기가 그 역할을 보완한다. 유리벽 속에서 관찰당한다면 차라리 낫겠다. 지금은 개인의 생각까지 추적할 수 있다. 알고리즘에 따른 온갖 이미지는 우리의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유리벽을 소통의 장벽으로 탈바꿈 시켰다. ‘모핑 이미지’에 유의해야 함을 말한 것은 20년 전이고, 사생활이 잠식당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도 20년 전이고, IT기술을 비롯한 특정 전문 지식을 갖추거나 이를 능숙히 활용하여 컨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이 새로운 ‘계급’을 형성할 것을 예측한 것도 20년 전인데, 하다못해 ‘저출생 고령화’를 염려한 것도 20년 전인데, 과거에서 내다본 미래의 문제는 정말로 현실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문제’도 곧 ‘현실의 문제’가 되리라 예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견해가 전적으로 합리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실제 원격 근무가 시행되면서 교사업무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는 데서 그의 생각이 빗나갔음을 볼 수 있고, 초등학교에서 인성교육을 강조하며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비롯한 이후 다음 단계의 교육이 그 중요성을 탈각해갈 것임을 내다본 것도 동의를 얻기 어렵다. 나는 특히, 대학의 역할을 ‘교육의 장’으로 보지 않아야 함을 말하고 싶다. 학교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공간은, 질문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가 번잡한 것을 피하고 편의성에 종속되기를 택한 데에는, 질문을 허하지 않는 강박적인 분위기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이 숙고 없이 살아간다는데, 정말로 그러한가 의문이 떠오를 때가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단순히 유희거리를 제공하는 이들보다 ‘슈카’와 같은 유튜버가 주목받는 세태를 이해하기 어렵다. 사회적 신뢰가 저해되면서 사적 제재의 유혹에 노출되는 이들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따지면서 재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분명 노동자는 줄어들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빈 시간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고, 정말로 그 전망이 딱 들어맞는 것처럼 한때 게임이 크게 주목받았지만 팬데믹이 잠잠해지자 급격히 시들해졌다. 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길 원하지만 노동이 전멸하길 원치 않는 개인의 욕구가 사회적 지지를 얻으면서 ‘퇴근하고 나서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목소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카페나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단순노동’인 줄로만 알았던 이들이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을 알아간다. 20년 전에 내다 본 미래가 딱 들어맞아 절망적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은 가능성 또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대면의 일상화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서로 대면하는 삶의 가치를 일깨웠다. 작년까지만 해도 메타 퀘스트나 애플 비전프로와 같은 VR기기가 대대적인 혁신을 가져오리라는 목소리가 상당했는데 지금은 그 과장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애플의 비전프로를 착용한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이게 대체 뭐야’라며 고도로 기술화된 일상이 ‘필요한가’를 자문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인공자궁의 실현가능성이 높아졌음을 알리는 뉴스가 나오자 ‘왜 이렇게 인간을 ‘생산’해야 하는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기꺼이 수고를 가까이하는 취미가 더욱 인기를 얻는 것 같다.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쓰면서 당장의 성과를 바라지 않는 일상을 꾸리는 이들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심심할 틈을 허락하지 않는 ‘쇼츠’에 ‘도파민 중독’이란 낙인을 찍고 경계해야 한다며 서로 곁눈질하는 것을 보면, 나는 낙관을 저버릴 수가 없다. 내가 즐기는 취미는 고루한 것이라 또래를 찾기도 어려웠는데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관련 매장을 방문하면 한산해야 마땅할 것 같으나 그 공간은 방문객이 가득하다. ‘네가(또는 세상이) 나를 쓸모없다 여겨도, 나는 쓸모없는 일을 자행하며 스스로의 쓸모를 만드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순간을 점처럼 찍는 시도. 점이 모이면 그것은 분명 모양을 갖출 것이다.


번거로운 몸놀림이 번잡한 상념을 밀어낸다. 상념이 사라진 자리에 스며드는 것은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상과 그에 수반하는 배려나 친절함일 듯 싶다. 얼마 전에 읽은 인터넷 사이트에 돌아다니던 글이 하나 떠오른다. 빵집에서 빵을 고르는데 한 아주머니가 대뜸 자기에게 빵을 하나 건네주더란다. “아가씨, 내가 오늘 일진이 너무 안 좋아서 기분 좋은 일을 하나 만들어야 겠어”라며 같은 빵을 두 개 사고 하나를 선물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설 배짱까진 없어서, 버거킹에서 부른 배를 잡고 나가면서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었다. 그 문은 당기기엔 너무 무겁고 밀기엔 쉬운 출입문이었고, 문 앞에 섰던 배달부와 잠깐의 목례를 나누었다. 20세기나 21세기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한가보다.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무용한 부지런함이, 나는 좋다. 그래서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가 서구적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인데다 20년 전의 그것이라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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