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서 큰 세계 (1) 프롤로그
‘이런 세계’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어린이책’을 만들고부터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이책이라고 불릴 만한 게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친척언니에게 선물 받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가 내겐 최초의 어린이책이자 단행본이었다. 그전에는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과 활자가 세로로 인쇄된 세계문학전집으로만 책이라는 걸 접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편집자가 된 나는, 어두컴컴하고 습한 지하실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그제야 ‘어린이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세계’가 있는 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그저 그런 세계’가 아니었던 이 작은 세계는 그동안 잠자고 있던 내 생각과 감각을 하나씩 깨우기에 바빴다. 어린 시절의 나를 불러내 당시엔 미처 몰랐던 감정을 헤아려 주고,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줬으며, 그때의 나를 대신해 화도 내주고 위로도 해 주었다. 왜 이 세계를 그제야 만났을까?
‘아, 이 세계는 잘 보이지 않는구나.’
그것은 들춰야만 보이는 세계였다. 그건 어린이의 키나 목소리처럼 작고 가벼워서 쉬이 무시당하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소위 잘 나가는 어른이 되기 위해 마음의 다락 한구석에 내려두어야 하는.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 세계였다.
어린이책은 나에게 곁을 보는 세계, 그 곁 중에서도 아래를 보는 세계, 비밀을 적은 뒤 꾹꾹 접어놓아 잘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세계,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 데 굳이 필요 없다고 치부되어 생략되어버린 세계를 보여 주었다. 또 어린이책이 일깨우는 감각은 어떠한가. 책 냄새, 비가 춤추는 소리, 마음속 알 수 없는 자국과 간지럼들, 약한 존재끼리 서로 기대는 일, 뛰어오는 친구의 땀방울, 엄마고양이를 잃은 아기고양이의 울음소리…….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인해 책으로만 접했던 세계가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들어왔다. 그 시간을 거치며 나는 아주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동안은 이런 세계를 책으로만 접하고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나와는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좋은 기회를 통해 ‘이런 세계’를 직접 삶으로 펼쳐볼 수 있었다. 일상에서 생략되어버린 아주 작고, 낮고, 먼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도 짧게나마 같이 살아냈다. 그것도 웃기고, 재미있고, 감동적이게.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남편이 툭 내뱉었다.
“나, 좀 쉬고 싶어.”
나와 알콩이(당시 4세인 딸)가 곁에 있긴 했지만 딱히 누구 들으라고 말한 건 아닌 듯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 한 템포 쉴 때도 됐지.’
지금까지 쉬지도 않고 소처럼 일한 남편을 보면서 우리도 3년 일하면 한 달 안식, 이런 거 하면 좋겠단 생각이 퍼뜩 들었다. 우린 무얼 위해서 그렇게 내달렸던 걸까?
“응. 그럼 육아휴직 해. 당신 살림하고 육아하는 시간 동안 내가 뭐라도 할게.”
그동안 우리는 외벌이었기에, 남편이 1년 동안 육아휴직을 하면 분명 생활비가 더 빠듯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남편이 쉬면 내가 짧게라도 알바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마 인구 30만인 도시(나는 세종시에 산다)에서 나 하나 일할 데 없을까 싶었다. 평생직장 구하자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고용중단여성’이었음에도 ‘뭐라고 되겠지’라며 앞으로의 삶을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으로 보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였다. 내가 가진 자격증과 경력을 곱씹어 보았다. 자동차 면허증과 노원지부에서 받은 수화 수료증, 레크리에이션 자격증, 정사서 자격증이 다였다. 그리고 다년간 어린이책과 잡지를 만든 경력이 있었다.
‘나의 들쑥날쑥한 이력이 고용중단의 벽을 뚫을 수 있을까‘란 고민이 무색하게 곧바로 잠이 들었다. 당시 내게 육아란 긴 생각을 허락지 않고 아이와 함께 (혹은 아이보다 먼저) 곯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난 어린이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그 시작은 미약하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엉뚱하게 다다른 어느 순간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 돌아보면, 내게 어린이도서관이 그랬다. 미약했고 다소 엉뚱한 도착지였다. 갑자기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하필 구직 사이트에서 어린이도서관 사서 공고를 보게 되었고, 유물처럼 묻혀 있었던 사서 자격증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큰 뜻이나 포부가 아닌 우연의 연속으로 운명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뭐, 사랑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 깊은 무의식 속에 언제나 함께하는 ‘어린이’와 ‘책’이 엉뚱하지만 당연한 곳으로 착착 이끌어줬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사서자격증이 있어서 마흔 넘어 얼떨결에 어린이도서관 사서가 된, 초짜 야매 사서의 일기이자 분투기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잊힌 세계’를 다시 펼쳐보는 여정이다. 이때 만난 책과 사람 들 사이사이에 주름처럼 접혀 있는 세계에는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더욱 힘을 빼고 편안하게 썼다. 너무 힘주다가 튕겨져 나갈까 두려워서다. 그러면 곤란하다. 이건 어찌되었건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소환하고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두의 ‘작아서 큰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떠듬떠듬 옹알이 같은 말들을 기쁜 마음으로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