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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라키 Jan 03. 2022

여행 후에 남은 것들

여행의 마지막 숙소가 있는 세화에 도착했다. 체크인 시간 전이라 거추장스러운 캐리어만 먼저 맡겼다. 바다를 따라 한참을 걷다가 눈에 띈 돌담이 이뻐서 다시 또 마을 구석구석 둘러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조용하니 바다도 동네도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이런 곳엔 좀 더 오래 머물면서 지내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화 바다 그리고 마을

제주는 기온은 높아도 바닷바람 때문에 날씨는 꽤나 추웠다. 한참을 걸었더니 춥기도 하고 좀 쉬고 싶기도 해서 눈앞에 '당근주스' 네 글자가 크게 써져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진동벨이 울려 받으러 갔더니 당근주스를 시키면 엽서를 하나씩 준다고 써서 우체통에 넣으란다. 주소로 보내주는 것 같은데, 한참이나 앉아 있었는데도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주소만 적은 채 그대로 가방 깊숙이 집어넣고는 보내지 않았다.

카페와 엽서 (몇 시간을 앚아 있었는데 찍은 사진이 없어서 카페에서 가져왔다.)

그러고는 다시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은 마을이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만 돌아가야겠다 싶어 발길을 돌렸다가 눈에 보인 하나로 마트로 들어갔다. 뭔가 색다른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육지와 별반 차이는 없었다. 온 김에 뭐라도 사야겠다 싶은 생각에 간식이나 할 요량으로 레드향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저녁때 먹어야지 생각을 하고는 숙소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냉장고에 넣어놓고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아뿔싸. 칫솔이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조카를 보러 갔다가 누나가 그렇게 좋다며 준 '왕타 칫솔'이다. 뚜껑도 있고 거치대도 있어서 여행할 때 편하겠다 싶어 나름 맘에 들었는데 화장실에 붙여놓고 쓰다가 그대로 두고 온 것 같았다. 두 번째 숙소에서는 계속 밖으로만 다니다가 떠나는 날 아침에서야 날씨가 조금 괜찮아져서 숙소 풍경을 제대로 보고는 한참을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는 시간이 다돼서 나왔는데, 나오면서 허전하다 싶어 방을 여러 번 확인했는데도 놓고 온 게 있었다. 허탈함이 들었지만 별 수 없었다. 다시 사러 가야지.

두 번째 숙소 베란다와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

저녁때쯤 다시 나가서 저녁을 먹고 편의점에 들러 칫솔을 샀다. 편의점은 왠지 그냥 나가면 섭섭하다. 간식거리도 몇 개 주워 담아서 돌아왔다. 날씨도 춥고 너무 걸어서 피곤했던지 따뜻한 방에서 움직이기가 싫었다. 방에서 사 온 간식을 먹으며 노트북을 하다가 잠들어 버렸다.


저녁에 먹어야지 했던 레드향은 다음날 저녁때나 돼서야 꺼내서 안주 겸 세 개를 까먹고는 남은 두 개를 다시 또 넣어놨다. 그리고는 또 하루를 잊은 채 보냈다. 마지막 날 아침에 조식을 받고 생각나 하나를 먹고 남은 하나는 버리기 아까워 가방으로 대충 집어넣었다. 무심코 가다가 어디선가 먹으면 되겠지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시국에 음식점이 아니고서야 실내에서 뭔가를 먹는 일은 불가능했고 다시 또 잊힌 채 가방에 담겨 함께 비행기를 탔다. 도착 후 비행기를 내리면서 다시 또 문뜩 떠올랐다. 혹시나 가방 속에서 터지지는 않았을지 걱정을 하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남은 가방을 비우는데 깊숙한 곳에서 주소만 적힌 엽서가 들어있었다. 책상 위에 나란히 같이 올려놨다.


애초에 서울까지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우연히 집까지 가져온 레드향 그리고 엽서 한 장이 여행의 끝에 남은 대단한 뭐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왠지 모르게 흐뭇해졌다. 여행을 다녀왔다는 유일한 흔적인 것 같아 먹기도 버리기도 아까워 한동안은 저러고 둬야겠다 싶었다. 짐 정리를 끝내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걸 바라보면서 앉아 있자니 문득 여행이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 무언가를 하나씩 가지고 돌아오는 것. 또 무언가는 잃어버리거나 버리고 오는 것.


벌써 또 일 년이 지나고 한 해가 시작됐다. 이제는 해가 갈수록 시간에 대한 무게감이 점점 더 느껴진다. 지난 일 년을 지나면서 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 아마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 시작된 일 년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할까 많은 생각과 걱정들이 앞선다. 올해도 뭔가 계획을 세워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왠지 아직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어느새 또 현실로 돌아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겠지만 당분간은 이 기분을 그대로 놓아두고 싶다.

새해 첫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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