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다섯,] 내 여행의 잔고는 얼마나 남아있을까?
#05. 고객님의 통장 잔고는,,
무심하게도
통장잔고는 정직하다.
여행 동선이 빼곡하게 채워지고
한국에서 떠나온 날들이 늘어날수록
통장잔고는 정확하게 줄어든다.
애석하게도,
줄어드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나마 버틸만했던 체력이 줄어든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첫 설렘들이 줄어든다.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남은 여행의 날들이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만큼은, 남들처럼은 해야 된다는 욕심이 줄어든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겁에 질리던 두려움도 줄어든다.
‘그랬더라면...’ 못내 담아두던 후회도 줄어든다.
그에 반해 늘어나는 것이 있다.
매일을 먹어도 주량은 끝없이 늘어난다.
어제도 오늘도, 자도 자도 잠은 늘어만 간다.
미련이 많은 맥시멀리스트답게 배낭의 무게가 나날이 늘어간다.
발바닥에 못생긴 굳은살도 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마운 인연들이 늘어난다.
또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난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오고 싶은 곳들이 늘어난다.
커피 한 모금으로 만족하는 아침이 늘어난다.
하루 중 아무 생각 없이 웃는 시간이 늘어난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늘어난다.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추억이 늘어간다.
그날의 일기가, 사진이, 대화가, 선물이 늘어간다.
평생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을 순간들이 자꾸만 늘어간다.
그렇게 내 여행의 잔고는
결코 닳지 않는 것들로 늘어간다.
그러므로 나는,
기어코 나는,
줄어드는 통장잔고를 뒤로하고
오늘도 기다랗게 늘어진 여행의 틈에서 눈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