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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Mar 27. 2017

칠레노가 사랑한 그래피티의 천국

#08.  칠레 발파라이소 


발파라이소는 칠레노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래피티의 천국이다.

칠레 산티아고에 머물면서 만나는 현지인들마다 
하나같이 발파라이소를 다녀왔다며 물을 정도였으니 
발파라이소에 대한 칠레노의 애정은 아주 남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를 가지고 있다는 일말의 자부심이었을까.
발파라이소를 말하는 그들의 눈빛은 언제나 빛나고 있었다. 


우연히 아르헨티나 멘도사에서 와이너리투어를 하며 만난 인도에서 온 그녀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4개월간 스페인어를 배우며 칠레의 매력에 푹 빠진 터였다.
내가 곧 칠레 산티아고에 가는 걸 알자 무엇보다 발파라이소는 꼭 가보라며
친절히 버스 이름과 티켓 가격까지 적어주었다.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기에 모두가 하나같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탄을 하는지 

한껏 차오르는 기대를 안으며 드디어 산티아고에서의 4일째가 되던 날 

발파라이소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산티아고에서 2시간쯤 달렸을까.
북적이는 사람들로 꽉 찬 도시가 버스 창문 밖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서울만큼이나 높은 건물과 커다란 도로들이 거리를 메우던 산티아고와는 다르게
발파라이소는 이곳이 진정한 칠레의 삶의 현장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햇살은 그림자도 삼켜버릴 듯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거리는 온통 뜨거워진 열기를 그대로 반사시켜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시무시한 햇살 사이로 불어 드는 상쾌한 바람이 내심 기분을 설레게 만들었다.


고개도 제대로 들기 힘들 만큼 뜨거운 남미의 햇살에서 

유일한 숨통이 되어준 칠레의 바람.
그 바람을 따라 나는 어느새 발파라이소에 도착했다.

    

조그만 버스터미널에 내려 지도를 받을 겸 곧장 인포메이션으로 향한다.
지도를 꺼내며 친절히 이곳저곳을 설명해준 직원 덕분에  
둘러봐야 할 곳과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할 곳의 위치를 쉽게 확인해두고는 
먼저 주린 배를 채울 겸 해산물 레스토랑이 모여 있다는 골목으로 향했다.



레스토랑 골목을 거닐자 벌써부터 하나같이 손님을 잡으려는 식당의 호객행위가 잔뜩 이어지고 있다.
몇 명을 제치고 걸어가던 중 우연히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칠레의 항구도시인 발파라이소에 온 만큼 해산물은 꼭 먹어봐야지!'라고 

굳게 먹은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하셨는지 

커다란 플래터에 다양한 해산물을 한가득 올려주는 요리가 일품이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금세 할아버지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커다란 내부로 이어진 식당 안은 곳곳에 신경을 쓴 듯한 인테리어와 그림들이 가득했고
칠레의 감성이 듬뿍 담긴 노래는 커다란 스피커를 통과해 식당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칠레에 왔구나, 정말 왔어!'

기분 좋은 혼잣말로 입맛을 돋우며 자리를 잡고 앉아 맛있는 음식을 기다린다.

세상에서 배고플 때 침이 뚝뚝 떨어지는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는 순간만큼

힘들면서 행복하고 초조하지만 설레는 미칠 것만 같은 순간이 또 있을까.

      
식전 빵을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는 사이 
커다란 그릇에 각종 해산물을 가득 채운 플래터가 등장하고 
그 뒤로 조그만 잔에 뽀얀 빛깔을 머금은 피스코 샤워가 함께 따라 나왔다.



플래터에는 홍합, 새우, 피조개, 게살, 등 다양한 해산물이 조화를 이루며 두 눈을 가득 채웠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만큼 푸짐한 맛과 모습에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해산물을 한가득 먹고 난 후의 입안을 달달하고 새콤한 피스코 샤워 한 모금으로 채우니
그제야 이곳이 칠레구나 하는 생각에 또 신이 난다.

음악에 취해, 조명에 취해, 맛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나는 어느 순간 칠레를 사랑하고 있었다.

     
배도 부르고 나른한 몸을 이끌고 나와 

잠을 쫓을 겸 진한 커피 한 잔을 홀짝 비워내고는
다시 발파라이소의 거리를 걷는다.


칠레노의 짙은 감성을 엿볼 수 있는 화려한 그래피티를 보러 가기 위해 서둘러 푸니쿨라를 탔다.

아주 조금 올라왔을 뿐이건만 어느새 발파라이소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 멈춰 서서 발파라이소의 시내를 하염없이 내려보다 단숨에 지도를 접었다.


더 이상 지도는 의미가 없었다.

아니, 지도를 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지도를 볼 새도 없이 펼쳐지는 거리의 알록달록한 색감들이,

그 사이마다 놓여있는 푸른 나무와 머리 위를 채우는 새파란 하늘이,

기어이 내 눈을 사로잡아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바람을 따라, 색감을 따라, 칠레의 향기를 따라 걷기로 했다.

칠레를 느끼기 위해선 자유로운 걸음, 그것뿐이면 되었다.

 


어디서부터 걸을지, 어느 곳으로 향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모두가 아름답다 마지않는 발파라이소에 올라서 있으니
어느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도 이곳은 아름다운 칠레의 발파라이소였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낡고 빛바랜 건물들이
하나같이 각자의 색을 드러내며 거리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발파라이소가 유독 다른 벽화마을과 다른 감동을 전해주는 건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작위적인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발파라이소에는 칠레노의 일상이 녹아 있고
칠레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살아 숨 쉬고
칠레노의 뜨거운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다양한 색감의 그래피티가 쨍한 햇살과 어우러져 발파라이소의 골목을 더욱 생기 있게 만들고 있었다.

발파라이소에선 두 눈을 사로잡은 매력적인 그래피티 만큼이나

골목마다 흘러나오는 그들의 음악이 때 아닌 칠레의 감성에 젖어들게 만든다.


칠레를 여행하다 보면 택시 안에서나 동네 어귀에 놓인 작은 바, 

그 어디에서고 농도 짙은 칠레의 음악이 들려오곤 한다.

발파라이소에서도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칠레노의 감성이 짙게 베인 로컬 음악은

그들의 얼굴과 삶의 모습이 녹아들어 있는 골목에서 유독 마음을 깊게 적신다.


그래피티가 그려진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그 뒤로 살며시 베어나오는 노랫소리가 더해져

가만히 걸음을 멈춰서선 조심스레 그들의 하루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말없이 그 리듬에 천천히 빠져들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그림을 그려놓았을까?

그들에겐 또 어떤 상처가 남아있을까?

그들에게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이토록 진실된 칠레의 모습을 마주할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이토록 진지한 칠레노의 삶을 담은 곳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이곳에 발을 놓인 그 누구라도 그 어떤 작은 감동 하나조차 받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발파라이소는 너무나도 대도시였던 칠레 산티아고에서의 아쉬움과 갈증을 한순간에 풀어버렸다.
왜 그토록 칠레노가 이곳을 사랑하는지
진정한 칠레의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왜 이곳으로 향해야만 하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더 높은 언덕을 쉬엄쉬엄 걸어 올라가 보기도 한다.
투박하게 그려진 벽화들이 가끔은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고
말끔히 정돈되지 않은 사랑스러움이 곳곳에 남아 더욱 생생한 칠레와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곳은 단연코 칠레노가 사랑하는, 

칠레노의 삶이 녹아있는 그래피티의 천국이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 
마음에 드는 벽화 앞에서 한참을 서서 오랜 시간을 머물러 본다.

푸른 나무와 오래된 지붕, 하늘 위로 둥둥 떠가는 구름과 어우러진 그래피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천천히 걸음을 이어간다.


생전 처음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 풀꽃


한국에서도 또 다른 나라에서도 수없이 봐왔던 벽화마을이지만
나는 어쩌면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나 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그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가만히 앉아 하나의 벽화를 오랜 시간 바라보며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사이 빨랫줄 사이에 걸린 크리스마스 종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캐럴이 흘러나오지 않는 크리스마스.
하얀 눈과 옷깃을 여미는 추위가 없는 크리스마스.
하지만 그보다 더 뜨거운 열정이 살아 숨 쉬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한 여름, 흥겨운 라틴음악이 거리 곳곳에 피어나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화려하고 커다랗진 않지만 소박하게 자신들만의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그들.
이곳에도 커다란 선물상자를 가득 들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따뜻한 크리스마스가 있다.

    
잠시나마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위에 놓인 12월의 남미에 
그 어느 곳보다 따스한 크리스마스가 도착하기를 바라본다.  



어쩌면 가장 좁고 빛바랜 골목 사이에도
이토록 따스한 온기가 걸려있음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며 이상하리만치 작은 행복에 잠겼다.
소소한 그들의 일상과 소박한 하루 속에서도

여전히 뜨겁게 불타오르는 열정과 삶의 현장을
나는 너무나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이 사랑하는 도시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어쩌면 그 말은 그들과 내가 잠시나마 함께였다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져들게 했으므로.
    
오늘만큼은 조금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야겠다.
그리고 조금 더 오래 그들을 바라봐야겠다.
더욱 사랑스러운 칠레를 내 안에 가득 채워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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