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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Aug 28. 2019

어두운 시대의 선거들

1979년 12월 6일 제10대~1981년 3월 25일 제11대 국선까지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선거_ 최규하 대통령 선출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에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된 후 1981년 2월 25일 신군부 쿠데타 세력 전두환이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 1여 년의 기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결정적인 국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벌거벗은 권력이 그 민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기였고 절차적 민주주의 제도로서 선거는 그 실질적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시기였습니다.


10.26 사건의 주역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10.26. 사태로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기까지 야당과 민주세력은 유신반대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투쟁의 시작은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당수 선거에서 뜻밖에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유신정권과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야권의 대립은 <YH 여성노동자 농성 사건>을 거쳐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으로 절정으로 치달았습니다.  결국 10월 16일 부산대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부산 마산 지역의 민주화 항쟁 부마항쟁이 시작되어 유신정권을 압박하고 있었고 이때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시위에 대해 강경진압을 계획하고 있는 박정희와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의 무모함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를 살해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최규하 10대 대통령 취임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자 1979년 12월  6일 헌법 제48조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 궐위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3개월 이내(1980년 1월 26일까지)에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최규하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대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을 마무리한 이후 제10대 대통령선거1979년 12월 6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제10대 대통령선거는 제8대 및 9대 대통령선거와 동일한 방법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실시되었으며, 대통령후보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단일후보였습니다.

신군부의 광주민주화항쟁 무력진압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는 처음에 유신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적 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취임 며칠 만에 박정희가 군부 내에 육성한 전두환, 노태우 등 '하나회'의 신군부 쿠데타가 발발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민주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1980년 2월 29일 정부는 윤보선과 김대중 등 687명의 정치인을 복권시키고, 4월 24일 서울 14개 대학 교수 361명이 학원사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며 학원 민주화를 요구했습니다. 학생 운동권도 5월 10일 23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비폭력 교내시위 원칙을 천명하는 등 각계의 민주화 요구가 표출되어 이른바 '서울의 봄'이 오는 듯 했습니다. 5월 13일 서울 지역대학 총학생회장이 가두투쟁을 선언하고 5월 15일 서울역 앞 광장에 10만 명 가까운 학생들이 모여 계엄해제와 조기 개헌을 요구하며 민주주의의 열망을 표출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총학생회장단은 '우리의 뜻을 알렸으므로 학교로 돌아간다."는 이른바 '서울역 회군' 선언을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모두 함께 싸우고 있는 줄 알았던 광주만 홀로 남았습니다. 이후 홀로 남은 광주은 신군부의 군화발에 처절하게 짓밟혔습니다.  


1980년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선거_ 전두환 선출


제11대 대통령선거는 전두환을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1979년 12ㆍ12 쿠데타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재임 8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1980년 8월 27일 실시하였습니다. 신군부세력은 5ㆍ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취하여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였습니다. 5월 17일 국무회의가 열리는 복도에도 무장한 신군부의 군인들이 도열해 있는 상황에서 신군부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정부 내에 없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신군부 세력의 위세 앞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명목상의 대통령에 불과했고 결국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11대 대통령선거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중심의 신군부세력에게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한 형식적인 선거가 되었습니다. 신군부세력은 보안사와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각종 사회단체 등을 내세워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결국 제11대 대통령선거에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혼자 출마하였습니다. 제11대 대통령선거는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졌고, 선거 결과 전두환 후보는 총 투표자 2,525명 중 1명을 제외(무효)한 2,524명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981년 2월 25일 실시- 제12대 대통령선거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대통령 취임 직후인 10월 22일 제5차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안을 확정하여 변형된 유신체제를 도입합니다. 유신체제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이 심해진 상황에서 그대로 유신체제를 지속할 수는 없었기에 약간의 변형을 꾀한 것입니다. 새로 마련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7년이고 5,000명 이상의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였습니다. 명칭만 다를 뿐 유신체제하의 통대 선거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통령에게 비상조치권, 국회해산권 등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고, 유신정우회와 유사한 방식으로 전국구 국회의원 제도를 부활시켜 여기에 국회 의석의 3분의 1을 배정했습니다. 이 전국구 의석은 선거에서 승리한 제1당이 무조건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를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는 여전히 중선거구제였으므로 정부여당은 손쉽게 전체 국회 의석 중 3분의 2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12대 대선 전두환 선거공보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이렇게 개정된 제8차 개정 헌법에 따라 제11대 대통령의 임기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1981년 2월 25일 실시되었습니다. 제12대 대통령선거는 간접선거제도가 유지된 채 선출 기관이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에서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진 선거제도는 없었습니다. 먼저 대통령 선출을 위한 5,277명의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가 2월 11일 실시되었습니다.  유신체제와는 다른 '민주적' 선거라는 선전을 위해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신문광고와 방송연설 및 선거공보의 3가지 선거운동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특정 후보자를 반대하는 내용,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거나 허위의 사실을 들어 후보자를 비방하는 내용, 「국가보안법」이나 기타 법령에 위반하는 내용은 게재하거나 공표할 수 없도록 제한되었습니다.

12.12. 군사 정변이 주역들, 노태우와 전두환(맨 앞줄 왼쪽부터 4번째, 5번째)


또한 야당도 선거에 적극 참여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미리 정보기관에 의해 기획되고 육성된 기획 야당이 선거에 참여해 선거인단의 일부를 획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12대 대통령선거에는 민주정의당 전두환 후보를 비롯하여 민주한국당의 유치송, 한국국민당 김종철, 민권당 김의택 후보 등 4명이 출마하였습니다. 그러나 제한된 정치상황 속에 선거 결과는 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선거인단의 4,755표를 얻어 유효투표수의 90.2%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어 제1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유신체제하의 통대 선거와 실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1981년 3월 25일 실시_ 제11대 국회의원선거


유신체제 하에서 정보기관이 공화당 등 여당을 기획하고 관리했던 것처럼 전두환 신군부도 민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참여하게 합니다. 이 시기에 더욱 놀라운 것은 보안사 등 신군부의 정보기관은 정부 여당뿐만 아니라 민한당, 국민당 등 야당과 심지어 혁신정당까지도 만들어 냈습니다. 때문에 국민들은 야당을 민정당의 2중대, 3중대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김대중, 김영삼 등 유력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제한하고, 여당과 야당을 정보기관이 통제한 채 심지어 국회의원 후보자의 출마지역까지 조정하는 등 정당활동에 대한 긴밀한 통제와 관리를 통해 신군부는 1981년 3월 25일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정적 의석인 151석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12대 총선 홍보깃발

제11대 국회의원선거는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제10대 국회가 당초 임기(1979. 3. 12~1985. 3. 11)를 다 채우지 못하고 1년 7개월 만에 해산됨에 따라 1981년 3월 25일 실시하였습니다. 제11대 국회의원선거는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처음 치러지는 국회의원선거로 제12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30일 만에 연이어 치러졌습니다. 전두환 정부가 제11대 국회의원선거를 4개월 앞두고「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기성정치인 567명에 대해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 김대중, 김영삼 등 기존의 유력 정치인들은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20여 년 만에 무소속 후보자의 출마를 허용했는데 이것도 여당 쪽 후보자에 대항할 만한 유력 야권 후보자들의 당선을 막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입니다.

12대 총선 투표함


선거전은 초반부터 신군부가 창당한 민주정의당과, 신민당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민주한국당,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한국국민당의 3당 대결구도를 보였지만,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은 지역구에서 90석을 획득하고 제1당이 되어 전국구의 3분의 2인 61석을 추가로 확보해 전체 의석의 54.7%인 151석을 차지했습니다. 형식적으로만 야당의 역할을 한 민주한국당은 81석을 차치하여 제1야당이 되었으며, 한국국민당은 25석을 차지하여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정당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군부는 자신들의 군사정변을 절차적으로 정당화하고 집권을 위한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여전히 체육관에서 탄생하고 있었지만 그 짙은 어둠 속에서도 새벽은 오고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봄이 오고 있었습니다.

신군부가 정권장악을 위해 잔인하게 진압한 광주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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