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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Nov 15. 2022

사이즈가 다른데도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감독, 임지호 양말복 주연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

- 니체, <도덕의 계보 : 하나의 논쟁서>



어떤 작가는 가족이란 쉽게 말해 함께 먹고, 싸고, 자는 사람들이며, 집이란 그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일 뿐이라고 거칠게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그들 상호 간의 이해와 애정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공간은 아니라고.  




김세인 감독의 첫 장편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보는 내내 이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돈다. 영화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속옷을 같이 입을 정도로 '가까운' 두 모녀가 그 '거리 없음'으로 인해 받는 상처와 감정의 굴곡을 세밀하게 그린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사랑을 원했던 딸과 이해를 바랐던 엄마의, 너무 가까워서 서로 베고 베이는 애증의 모녀관계를 긴장감 있게 다룬 심리 드라마이다.


 



엄마 수경의 삶은 무거웠다.  30 킬로그램 정도의 왜소한 체구로 4 킬로에 달하는 우량한 딸을 낳아 홀로 쑥 찜질방을 운영하며 이정을 키워냈다. 그래서 딸 이정이 자신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자신의 분신 같다. 젊은 나이에 싱글맘으로 어린 딸을 키워내려 손님들의 온갖 감정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자신에겐 버겁고 너절한 삶의 무게를 덜어낼 통로가 없었다. 그래서 수경에게 이정은 감정의 찌꺼기를 쏟아낼 유일한 감정의 쓰레기통이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딸 이정의 졸업식이나 생일을 세밀히 챙길 여유가 없었다. 이정이 어떤 사이즈의 속옷을 입어야 하는 지도, 이정의 첫 생리가 그녀에게 얼마나 충격적인지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자신의 젖에만 의지하던 여린 존재였던 이정이 어느덧 몸은 커져 있었지만 여전히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신적 미숙함에 답답했다. 심한 생리통까지 자신을 닮은 이정이 자신의 딸임에는 틀림없지만 엄마인 자신의 삶을 조금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야속하다. 그래서 자주 싸운다. 싸울수록 이정이 더 야속하고 밉다. 여전히 자라지 못한 이정에게 자신의 젖이 더 필요한 거 같아 답답하다.




딸 이정의 삶도 무거웠다. 또 마땅히 받아야 할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그녀의 삶은 메마르고 씁쓸했다. 자기 또래 아이들은 다 받는 부모의 사랑은 기대할 수 없었다. 엄마는 사랑은커녕 학대에 가까운 무관심과 냉대를 보여줬다. 자식의 생리혈이 손에 묻어 더럽다고 말하는 수경을 엄마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자주 싸울수록 자신이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와 싸울수록 그녀를 이해하기 더욱 어려웠고, 집은 더 답답해졌다. 자신을 낳아놓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존재는 없는 듯 무시하며 남자 친구와 집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엄마가 도무지 제정신인가 싶었고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엄마의 옷가지를 가위로 잘라버렸고, 엄마 남자 친구가 보낸 선물을 허락도 없어 뜯어 먼저 입어 버렸다. 엄마가 싸우다 자신을 차로 죽여버리려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사과를 요구했지만 엄마는 사과는커녕 오히려 비난과 욕설만 되돌려 줬다. 그래서 엄마를 법정에서 고발하기로 했다.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모녀 관계의 현실을 성급한 화해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정전이 마련해준 자리가 마치 모녀라는 관계를 지워버린 듯 담담하게 수경이 자신의 목소리를 전할 뿐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이 화해가 아니라 '결별'로 마무리될 것임을 암시한다. 너무 가까워서 너무 많이 기대하고, 너무 많이 의지하며, 너무 많은 상처를 주는 정상가족 신화 속의 애증의 모녀관계는 '거리'가 필요하다. 엄마가 딸을, 딸이 엄마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거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 '거리 없음'은 오히려 많은 오해와 혼동, 무지를 낳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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