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헬스장 체험기 1
거의 1년 반 동안 책상에 앉아 집필을 하니 어깨와 목의 통증이 심해졌다.
작가라면... 움직일 때 마다 사각사각 소리 나는 티없이 하얀 코튼 원피스를 입고 스페인의 발렌시아 해변을 유유히 거닐며 그 여름의 감상을 기록하는 삶을 상상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파자마를 입은 채로 서재에 갇혀 짧으면 3시간, 길면 6시간까지 줄곧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쓰고 또 쓰는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밖에는 어둡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런던이다. 불량한 자세로 인한 어깨와 목의 통증은 이제 심한 두통으로 이어졌다. 작가의 직업병이란 이런 것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시름시름 앓다가 안되겠다 싶어 헬스장으로 향했다.
남편은 이제 아내가 작가라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며 신이 났는지, 내게 베레모와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레깅스에 야구모자를 눌러 쓰고 노트북을 가방에 챙겨 집을 나섰다.
작가의 집필이란 그간 외부 세계와 접촉하며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푹 우리고 고아내는 과정으로, 자발적 고독의 시간이다. 이제 그 시간을 충분히 보냈으니 혼자 하는 운동보다 그룹 클래스가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눈에 확 들어온 것이 초보를 위한 복싱 클래스였다.
복싱이라고 하면 가난에 대한 서러움과 분노를 헝그리 정신으로 씹어먹고 맨주먹 하나로 인간 승리 하는 절실함과 울컥함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다이어트에 좋다는 얄팍한 이유와 함께 뭔가 나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 어색함에 끌렸다. 프로 복서이자 여배우인 이시영씨의 화난 등 근육을 보고 탄성을 꽥 지르며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첫 수업을 등록했다.
헬스장의 복싱 수업은 맛보기와 같은 초보 수업이었다.
우범지대의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희망을 주겠다는 사명감으로 몇 십년이나 지역 사회를 지켜오신 관장님이 떡하고 버티는 곳이 아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기초 체력 과정도 없고, 챔피언 노래를 배경으로 홀로 분노의 샌드백을 치는 록키의 시간도 없다. 어쨌든 한 줌꺼리도 안되는 내 주먹은 전혀 울지 않는다.
첫 수업부터 파트너와 짝을 지어 한사람은 치고 다른 한사람은 받아주며 연습한다. 아직 스텝(풋워크는)은 제대로 배우지 않고 기본 펀치 동작을 배운다.
직선으로 때리는 안면 스트레이트 펀치, 왼쪽 오른쪽: 원투 원투
몸통의 힘을 이용한 사이트 펀치, 왼쪽 오른쪽: 쓰리포 쓰리포
아래에서 위로 턱을 날리는 어퍼컷 펀치, 왼쪽 오른쪽: 파이브식스 파이브식스
위의 기본 동작 익히고 바로 순서를 만들어 동작 연결에 들어간다.
다 같이 따라 해보자.
원투 원투 슬립(사이드로 살짝 빠지며 피하기) 쓰리포 파이브
재미있는 복싱 수업에도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채 파트너와 연습 하다 보니 어쩌다 함께 하기 힘든 사람과 짝이 되면 난감하다는 점이다. 더 자세히 묘사해 보자면 처음부터 지나치게 감정 이입하며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공격적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렇다. 지난 일주일간 제대로 삭히지 못한 분노를 위산이 가득 한 채로 상대의 얼굴에 필터 없이 뿜어 버린다.
5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그녀.
대체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지 눈맞춤이나 인사도 없이 바로 링에 올라 챔피언 매치를 할 기세다. 나보다 한참 작은 체구에 굳어 있는 얼굴은 실리콘이 아닐까 생각하며 두 검지로 입꼬리를 올려주고 싶다. 그녀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달려든다.
나는 샌드백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 속 썩이는 남편과 아이가 되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분을 참지 못하니 힘 조절도 당연히 안된다. 내가 제대로 잡아주지 않는다며 일일이 지적하고 훈계하거나 한숨을 푹푹 쉬며 화를 낸다. 사실 나는 운동신경이 꽤 있는 편으로, 정작 본인이 틀려 놓고 마음대로 안되는 답답함을 타인에게 전가하며 화풀이하는 불도저형 그녀를 보며 점점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다.
나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멈춰서 말했다. 마치 껌 좀 줄래? 하듯이.
“워워…저기요. (Hey, relax huh? Take it easy.) 저도 초보고 그 쪽도 초보니 힘좀 빼요. 힘좀 빼라구요. 재미로 하는 거지 챔피언 매치가 아니잖아요. 피차 초보니 지적하지 마시고요. 저도 기분 좋지 않아요.”
반응하지 말고 대응하기: 내 손으로 직접 집필한 책<나를 지키는 관계가 먼저입니다>에 나온 내용대로 [감정, 요구]를 중심으로 이에 옵션으로 생각을 살짝 버무려서 욱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몇 번이나 잠시 멈춰 릴랙스하라고 경고를 주었는데 막무가내였던 그녀.
결국 안되겠다 싶어 수업이고 뭐고 이제 한 단계를 올려서 올스톱하려던 차에, 그녀가 스스로 잠잠해 지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녀는 동작 순서를 까먹었는지 슬립으로 피해야 하는 상황에 온 몸의 힘을 실어 사이드 펀치를 날린다.
슬립은 미끄러지듯 살짝 사이드로 빠지며 피하는 동작이다. 그때만큼은 공격을 받아주는 사람이 마치 공격하는 것처럼 팔을 뻗어 젠틀하게 상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려 주는데, 그녀가 슬립 순서를 까먹고 사이드를 날려버리는 통에 그녀의 어깨로 뻗은 내 팔을 치면서 결국 자기 얼굴을 가격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주먹에 자기가 한방 먹게 되었다.
분명 내 잘못이 아니라도 보통은 “괜찮아요? 좀 천천히 할까요?.” 했을 텐데, 나는 미안하지 않았고 사과하지 않았으며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
다만 “힘 빼지 그랬어요.”표정 없는 한 마디를 할 뿐.
그녀가 한 대 맞고 정신차린(?) 덕분에 나머지 수업시간은 비교적 조용하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은 당연히 책에 나온 대응법과 무관하게 얻어걸린 부분이지만, 결국 자폭하는 불도저형의 부작용에 해당된다 (책 2장 참조).
'몇번이나 한 경고를 했건만, 내가 올스톱 해 버리거나 혹은 본인이 제 손으로 한대 치기 전에 멈췄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굳이 벌 주지 않아도 결국 스스로 벌 받는 불도저의 방식은 자기가 설 자리마저 밀어버린다.
수업을 마치고 인원이 빠져나간 후에 선생님께 다가가 정중하게 말씀 드렸다.
“죄송하지만 저 사람과 파트너하기 힘들 것 같아요. 수업 중에 이러 이러한 문제가 있었고 정말 힘들었지만 선생님 봐서 중간 이탈 없이 끝냈어요. 제가 재미로 복싱 수업을 들으러 온 거지, 분노조절 그룹 (anger management group: 분노 조절의 문제로 공격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위한 집단 심리치료)에 온건 아니에요. 다음 수업에 이 부분 꼭 감안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수업 참여가 힘들 것 같습니다.”
분노 조절 그룹 치료라는 말을 꺼냈을 때 선생님은 빵 터지며, 내게 사과했다.
나는 업무 시간에는 프로로서 내담자 중심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적인 시간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 또한 나 자신을 돌볼 책임이 있고 나의 니즈(needs)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계선을 확실히 지키는 것이 바로 프로다운 공감이며 내담자와 치료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따라서 복싱 수업을 분노조절 그룹으로 착각하고 온 그녀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
그러자 선생님은 실은 그녀에 대한 다른 회원의 불만이 많았고, 이미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말하며 다음에는 다른 사람과 짝을 지어 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다.
다음 수업은 키도 175센티 정도로 훤칠한 데다 체격이 다부진 파트너를 만났다.
그녀는 수업 시작 전부터 범상치 않았다. 예리하고 매서운 눈에서 레이저 빔이 나올 것 같았고 손에 붕대처럼 생긴 보호대를 칭칭 감으며 몸을 푸는데, 뭔가 프로의 스멜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그녀에게 맞으면 가루가 될 것 같았다. 정신줄 똑바로 챙겨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왠걸.
수업이 시작되자 서로 인사를 하는데, 그녀의 다정한 미소에 긴장이 사르르 녹아 버렸다. 관상이 과학이 아닐 때도 많다. 그녀는 화가 난게 아니라 수줍어서 무표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속도에 맞춰 가며 동작을 연습했다. 부족한 부분은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복싱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래, 해피엔딩이다.
내 주먹은 웃는다.
*커버 이미지: 영화 주먹이 운다의 한 장면. 출처: 영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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