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자를 위한 고대 도시 메디나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가지 않은지 3년째가 들어서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러자 바로 모로코가 떠올랐다.
런던에서 직항을 타고 3시간이면 닿을 수 있지만 문화적 거리감은 7시간은 족히 넘을 것 같은 곳.
오래전 우연히 접했던 모로코의 이국적인 맛의 추억이 입안에 가득 고인다. 달짝지근하면서 상쾌한 민트 티와 보슬보슬한 쿠스쿠스, 적절한 양의 지방이 지글지글 녹아 달콤한 살구와 계피향이 버무러진 양고기...
하지만 모험을 감행하자니 오춘기에 접어든 집돌이와 까다로운 6세 집순이를 설득하는 난관을 넘어야 한다.
“모로코의 올드 타운에 가면 당나귀도 탈수 있대.”
이 한마디로 집순이는 단번에 설득했지만 툴툴거리는 집돌이를 설득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집돌이는 설득이고 뭐고 할 것 없이...당나귀 처럼 그냥 끌고 갈 수 밖에.
'이히힝' 하고 짜는 소리를 내는 집돌이를 끌고 집순이를 등에 이고, 그렇게 우리는 우당탕탕 비행기에 올랐다.
메디나
메디나는 기원전 9세기, 그러니까 약 천년전에 만들어 진 '성 안의 고대 도시'이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적이 처들어 오면 몇개의 게이트만 홀랑 닫아도 철통 봉쇄할 수 있고 그 안에서 버틸만큼 버틸 수 있는 구조이다.
특히 페즈의 메디나는 9000개가 넘는 수많은 골목길로 이루어 져 있으며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도 허다하다. 메디나의 미로는 태초의 설계자에 의한 계획 도시가 아니라 천년에 걸쳐 더하고 빼는 과정이 계속되며 마치 자연 발생한 것 처럼 제 멋대로 만들어 져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계획 없이 만들어 진 것이 곧 이들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어쩌다 적이 메디나 안으로 침투한다면 단 5분만에 길을 잃고 말테니까. 그 안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도 길을 잃는 일이 허다하다면 페즈의 메디나는 방 탈출게임에 최적화 되어 있는 '악명 높은' 미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메디나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바로 길을 잃어도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금이라도 다니던 길을 벗어나면, 결국 어느 순간에는 모두가 길 잃은 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 곳은 길을 잃지 않는 법 보다 길을 잘 잃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새로운 것, 확실하지 않은 것,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 하나 계획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괴로운 사람들에게 이 곳은 악몽 같은 곳이다. 혹여나 이러한 범불안 장애 증세로 고통받는다면 치료사와 함께 메디나에서 길을 잃는 경험을 치료 과정의 하나로 추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삶을 살아내는 데도 길을 잃지 않는 법 보다 길을 잘 잃는 법이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
메디나 입구인 블루게이트를 들어서면서 처음엔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깊숙히 들어 갈 수록 표정이 엄중해 진다. 대다수가 구글 맵에도 잡히지 않은 골목길인데, 벽이 높고 길이 좁아 대낮에도 어두침침하고 인적이 뜸해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서면 불안함이 극에 달하고 우왕좌왕 하게 된다.
골목길이 꺾이는 갈림길에는 조직적으로 관광객을 낚는 골목길의 '하이에나'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불안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눈빛을 귀신같이 포착한다. 나 또한 깊숙히 들어갈 수록 점점 긴장감이 느껴지며 심장이 슬슬 조여오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빈도가 잦아진다. 결국 미로에 갇혀 꼼짝달싹 할 수 없다고 느껴지며 공황상태에 빠지기 직전. '자매님, 거기는 막다른 길이에요. 이쪽이 메디나에요.' 하며 친근하게 길잡이를 해 주는 주민을 보면, '사실 난 이미 메디나 안에 있는데??'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두 손을 덥석 잡고 따라 나서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들은 잘 가고 있는 사람에게조차 '거기는 막다른 길이야.'라며 불안감을 부채질 하는가 하면 호의적인 태도에서 돌연 공격적으로 변하며 수고비를 강요하기도 한다. 불안을 이용하는 전략은 전 세계 어디든 잘 팔리는 고전적인 상술이다.
길을 잘 잃는 법 1: 골목길의 하이에나
길목에 떡하니 자리 잡고 무슨 건수가 없나 노리는 골목길의 하이에나들은 사실 상대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내 안의 불안감이 그들과 엮이도록 부채질 한다.
몇몇은 그날의 장사가 신통치 않은지 할 일 없이 시시덕거리기도 하는가 하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난 아이 아빠까지 합세한다. 그러면 나는 뭔가 골탕먹었다는 굴욕감과 그들의 '심심풀이 땅콩'으로 전락 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결국 일일히 대꾸하지 않고 길을 잃든 말든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상대하지 않다 보면 열이면 열, 그들은 제 풀에 지쳐서 그냥 가버린다. 단지 귀찮을 뿐, 위험하진 않은 것 같다.
가만 보니 우리를 휘두르는 하이에나들은 비단 메디나의 골목길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안에서도 서성거리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의 갈림길에 서서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며 이리저리 휘두르는 마음의 하에이나는 상대하지 않고 놔두어도 되지만, 실은 내 마음이 자꾸 엮이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길을 잘 잃는 법 2: 눈 앞의 목표가 아닌 전체적인 방향으로
메디나에서 길을 잘 잃는 법에 대한 팁이 있다면, 눈 앞의 목표가 아닌 전체적인 방향을 염두해 두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입구이자 출구는 블루 게이트이다. 구글 맵을 켜고 블루 게이트가 메디나의 북서쪽이라는 방향만 주시한다면 어떤 막다른 곳에서 길을 잃게 되어도 괜찮다. 마치 북극성을 바라보고 항해하는 것 처럼 말이다. 맵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좁고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결국 돌아 돌아 북서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되니까. 지금 당장 길을 잃었다 해도 분명한 방향이 있다면 크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발 길 닿는대로
골목길의 하이에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상인은 친절했다. 졸졸 따라오는 아기 고양이는 뜻밖의 선물이었으며 계획하지 않고 발길 닿는대로 '우연히' 마주친 관광지는 덤이었다. 만약 꼭 봐야 할 곳을 리스트로 만들어 도장깨기를 했다면 계속 길을 잃는 통에 잔뜩 화만 났을지도 모른다.
전통 방식의 가죽 염색 공장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첫날 투어 가이드와 했던 계획 관광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수학여행이나 답사를 하러 온 것도 아닌데 더운 날 하루종일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본의 아니게 수업(?)을 듣다 보니, 쉽게 지쳤던것 같다. 여행은 발길 닫는 대로 떠나는 맛이 있어야 더욱 즐겁다. 우리 삶도 그런게 아닐까?
메디나의 내부는 마치 동대문 시장, 광장 시장, 수공예 마을, 한옥 마을, 인사동을 모두 원스탑으로 한 곳에 모아 놓은 것 같다. 주거지 뿐만 아니라 유통, 수공예 장인이 좁은 땅에 촘촘하게 몰려 있다. 특히 수공예의 명성은 자자해서 결혼이나 명절을 위해 전통 의상이나 장신구,가구, 철제 수공예 작품 등을 장만하러 다른 도시에서도 '물건을 떼러'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사원과 세계 최초로 설립된 대학교 까지 모두 메디나 안에 있다. 아마 그 옛날에는 적의 침공에도 몇달은 버틸만큼 자급자족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당나귀는 어땠냐고?
좁고 복잡해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하는 메디나 안에서 당나귀는 오물 주머니를 차고 다닌다. 그 덕에 더운날엔 냄새가 심해 결국 깔끔쟁이 집순이는 당나귀를 포기했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호텔로 돌아와 내 등에 집순이를 태우고 대신 당나귀가 되어 주었다. 이히힝-
휴가를 가서도 열일을 하는 엄마의 팔자란 이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