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농도
이상하게 오늘은 새벽에 눈이 떠졌다. 설레게 기다리는 것도 없고 미뤄둔 일 걱정도 없는데 눈이 떠졌다. 아직 쌀쌀한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뜨다보니 커튼을 슬쩍 들어도 햇빛이 스며들지 않았다. 아이는 세시방향으로 몸을 틀어서 자꾸 발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자고 있길래 바로 원래 자리에 바로 눕이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켜니 여섯시였다. 여섯시.
내게 여섯시는 친숙한 시간이 아니다. 대학교 다닐 때 밤새 술을 마시거나 과제를 하다가 밤을 꼴딱 새거나 할 때처럼 여섯시는 시작이 아니라 다음날 에너지를 미리 당겨 써버린 전날의 마무리 시간이었다.
문득 선물처럼 온 이른 아침 시간을 모른척 그냥 자기는 아쉬웠다. 당장 운동을 하거나 새벽 뉴스를 보거나 지금은 하는지 모를 굿모닝팝스를 듣거나 혹은 다 마른 빨래를 개거나 하지는 않았어도 그저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보고 커튼으로 새어드는 빛의 조도차이를 느끼면서 나의 어제와 지금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유익했다와 행복했다 사이 정도의 기분 좋은 시간.
가습기에서 김이 올라오고 아이 숨소리는 한결 편안해지는 걸 들으며 과연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가는 것인지, 정말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해야 할것들을 모른채하거나 잘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맞게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생각들이 구체적이지는 않았고 자다 깬 몽롱한 상태의 정신집중처럼 내 하루의 시간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24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살아보자고 한다. 어떤 글에서는 요즘 사람들은 하루 27시간을 살아간다고도 한다. 하도 멀티태스킹을 많이 해서 하는 소리다. 나조차도 밀도있는 삶, 바쁘지만 성과도 많이 내는 삶을 추구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내 삶은 좀 동떨어져있는 것도 같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내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내려놓음이나 대학원 논문이 기계처럼 뚝딱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위험부담이 겹치면서 혼자 만들어내는 시간이 중요해졌다.
아침 햇살이 점차 밝아지면서 방안에 볕이 들었다. 다를 것 없던 방안은 환해지고 잠꼬대로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을 가만히 볼 수 있었다.
나는 하루를 길게 쓰는 법을 배워야겠다. 그래서 아이를 바르고 예쁘게 키우고 나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 남편과 더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2020년 1월 20일 쓰다만 글을 이어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