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효진 Jan 29. 2021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기호와 해석의 세계

이런 날이 올 것이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가지고 온 종이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캐릭터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위 빈 공간에는 아이의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이가 늘 집에 오면 이야기하는 어린이집 베프가 선물로 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 종이에서 삐뚤삐뚤하지만 정확하게 적혀있는 아이의 이름을 보며 띵!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얘는 글을 쓸줄 알잖아!'

 

평소 피곤하다고 아이가 그림책 읽어달라고 해도 몇권 읽어주지 않았는데, 다른 아이들은 벌써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수준이 되었다는 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가 특히 좋아하는 고양이책, 상어책, 뽀로로병원책을 몇번씩 읽어주면 아이는 그 페이지 그림을 보고 비스므리하게 혼자 책을 읽는 시늉을 하기는 했는데, 고양이라는 글씨나 뽀로로라는 글씨는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가 말을 글로, 다시 글을 말로 풀어 내는 것이 당연시하다보니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글은 말을 표시하는 하나의 규칙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규칙을 모른다면 그냥 풀숲의 풀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모양과 다를 게 없다. 그나마 우리 한글은 형태가 말의 소리와 연관지어져 모음자음의 모듈을 익히고 나서 그 조합을 연습하다보면 수백수천가지의 소리를 바로 적고 읽을 수 있는 과학적인 글이다. 아이도 그 원리를 익히면 당장 이런저런 글씨를 읽지는 못해도 금새 늘것이라는 기대는 있다.


문제는 아이가 자음과 모음을 모두 익히게 하는 첫번째 관문에 있다. 부랴부랴 사준 한글학습지는 그림과 단어가 같이 적혀 있어서 글자를 익는게 아니라 그림으로 글자를 추측해서 읽는바람에 아이가 글씨를 잘 익히지 못하였다. 괜한 스티커 놀이만 하고 당장 지금 익히고 있는 글씨가 '라'인지 '두'인지도 모르는 판국이라 가르치는 엄마로서는 멘붕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이 학원선생 몇년을 했는데, 아이를 가르치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싶지만 정말 기본의 기본, 이제 사회적 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어엿한 학생으로 자식을 키워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일인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학창시절부터 공부할 때 계단이라는 개념을 많이 되뇌인다. 한번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최소한의 분량이 될때까지 진득하게 해야 다음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개념이다. 마치 계단의 높이 이상 되어야 그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99%높이만큼하다가 그만두면 다시 그 단계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아이와 한글 공부를 하면서 첫날 ㄱㄴㄷㄹㅁ ㅂ 자음을 써주고 기역니은디귿... 읽어주면서 연필로 쥐고 쓰도록 했다. 엄마가 쓰는 걸 보고 따라쓰면서 제법 획순도 익히고 모양도 조금씩 비슷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ㅂ까지 다 쓰고 나서 다시 ㄱ을 가르키며 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하는 것이었다. 조금전 쓴 ㅁㅂ은 대답하는데 처음으로 써본 ㄱ을 대답못한다는 것이 황당해서 '왜 ㄱ을 기억못해?'라고 호통을 치고 말았다. 아이는 주눅이 들었고 대충대충 찍기신공으로 몇번의 반복끝에 ㄱ부터 ㅂ까지 읽고 쓰는 것을 무사히 마쳤다. 처음으로 ㄱㄴㄷㄹㅁㅂ을 쓰고는 씩 웃고 엄마는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니까 너무 기뻤는지 주눅들었던 아이는 다음에도 또 한글공부하자고 하며 뿌듯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잠자리에 들며 다음날은 나머지 ㅅㅇㅈㅊㅋㅌㅍㅎ 을 익혀야 하는데 또 전날 배웠던 것들을 기억못할까봐 은근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다음날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스케치북에 배운 ㄱㄴㄷㄹ...을 순서대로 제법 완벽하게 쓰고는 의기양양하게 엄마를 불렀다. 정말 뿌듯한 순간이었다. 


대충 자음을 한바퀴 돈 다음에는 초성퀴즈를 내듯 자음의 소리를 '그~', '느~','드~'하며 가방, 나비, 드럼... 을 읽어주고 단어 속에 들어있는 ㄱㄴㄷ을 가르키며 이걸 보면서 소리를 예상할 수 있으니깐 글자를 맞출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냉장고와 자전거를 써놓고 아이에게 자전거가 뭔지 맞춰보라고 했다. 확률로 절반이라 모르고라도 맞출수는 있지만 아이에게 그림을 기호로 읽어내는 기쁨을 주고 싶었다. 몇번의 시도에서 몇개는 맞추고 몇개는 틀리면서 아이가 익숙한 자음과 덜 익힌 자음을 추려서 조금더 연습했다. 이부분은 아직 진행중이다.  


그래서 아직 모음인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는 본격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 ㅏ,ㅗ,ㅣ 만 몇번 써보게 하면서 자음옆에 끼워두고 써보게 시켰는데 어제는 좀 딴전을 피우면서 인형놀이만 한다고 들어서 공부를 못했다. 애초에 자음모음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고 두개가 합쳐져야 글자가 된다고 말해주고 눈에 익숙하게 글자들을 써보이고 있는 수준이다. 


일상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엘리베이터에서 12층 사시는 아저씨덕분에 숫자 두자리수에 관심을 가지더니 이제는 지나가는 길에서 숫자나 글씨를 보면 예전보다 더 관심을 갖고 읽어보려고 애쓰는 것이 보인다. 엄마는 이렇게라도 성의를 보였으니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름도 써주고 카드도 써줄 수 있는 날이 좀 빨리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이제는 자기 이름을 쓸줄 알고 엄마아빠 이름 구별할 줄 알고, 몇몇 단어는 기억했다가 맞추고 하면서 점점 아이의 세상이 조금씩 넓어지는 것을 지켜본다. 제아무리 직관적이고 매핑이 잘된 미디어를 사용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규칙과 그 규칙을 발판삼아 더 나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기호나 상징, 미디어를 읽고쓰는 리터러시의 힘에서 만들어진다. 혼자서 책을 읽고 생각을 글로 남기고 다른 사람들과 정서와 지식을 나누면서 보고 느끼는 우리의 세상이 복잡하고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이가 점차 깨닳기 시작한 것이다. 


모쪼록 모음까지 잘 공부해서 이들 조합이 이렇게저렇게 만들어져서 어려운 단어도 쉽게쓰고 읽는 날이 순순히 다가오기를 희망해본다. 딸아.



비로소 소장 장효진.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와 아름다움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