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불태워 사랑했으니 후회는 없어요
재즈와 쌉싸름한 커피,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이 떠오른다. 피닉스는 삼엄한 검문소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검문소의 군인은 붕대를 감고 있는 넬리에게 붕대를 풀 것을 종용한다. 여기서 흥미와 동시에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보통의 한국영화들이라면 어땠을까. 넬리의 지난 고통의 시간들을 여과없이 표현했을 것이다. 사건을 겪은 피해자들, 생존자들은 배려하지 않은 채. 하지만 피닉스는 이 지점을 공백으로 둔다. 오히려 검문소 군인의 일그러진 얼굴, 당혹스러운 표정, 어찌 말할 수 없어 미안하다고 읊조리는 장면으로 대신한다. 관객에게 상상할 여지를 두는 것이다. 넬리는 유태인 수용소에서 얼굴에 총상을 맞은 채 살아남았다. 재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의 고통을 참아낸 생존자. 그녀는 의사에게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의사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고 절대 같아질 수도 없다고 말한다. 예전처럼. 전쟁을 겪은 자라면 모두들 꿈꾸는 것.
영화 속에서도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넬리의 보호자이자 친구인 레네는 재건수술 이후 그녀가 살던 폐허가 된 집으로 넬리를 데려간다. 전쟁으로 일상이 무너진 모습, 붕괴된 후 재건이 필요했던 독일. 그렇지만 전쟁을 겪기 전의 삶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자들. 넬리는 이 장소에서 깨진 거울 속 비친 자신을 외면하듯 돌아선다. 레네에게 '너는 나 알아보겠어?'라고 말하며 사진과 과거의 흔적을 손으로 더듬거린다. 넬리는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난 모습들이 자신이라며 외치는 그녀에게선 불안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정체성의 혼란이 오겠지. 넬리라면 더더욱. 유태인과 독일인 사이에세 오는 그 괴리감, 전쟁을 겪은 상태. 그래서일까 넬리는 전남편인 조니를 애타게 찾아다닌다. 흔적이라도 발견하길 원한다. 그녀는 사랑했던 조니에게서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수용소에서 넬리를 끝끝내 살아남게 만든 힘은 조니 덕분이라고 했으니.
수소문하던 넬리는 클럽 '피닉스'에 입장하고 우연히 조니를 발견한다. 아니, 단번에 찾아낸다. '있잖아. 사랑이면 단번에 바로 알 수가 있대.' 다섯 번째 계절이라는 노래 속 가사처럼. 하지만 조니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되려 아내와 닮았으니 죽은 아내를 연기해 상속금을 찾자고 말한다. 가장 잔인했던 장면이다. 심장에 칼을 꽂는. 그녀에게는 그런 상처보다는 조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나, 제안을 수락한다. 그 공간에서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넬리는 온몸으로 자신을 알아봐달라고 표현한다. 그를 위해 예전의 얼굴로 재건 수술을 받고, 필체를 보여줘도 조니는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다. 사랑, 이 우스꽝스러운 촌극. 넬리는 왜 가장 큰 사랑을 주는 레네를 보지 못할까. 안타까웠다. 레네와 함께 'Speak Low'를 들으며 식사를 할 때, 레네는 수줍은 듯 '나에게 불러줄래?'라고 말한다. 우정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고백과도 같은 말이다. 레네가 입은 옷에 집중해볼까. 붉은 색이다. 피닉스에 입장했을 때도 붉은 조명, 붉은 커튼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넬리는 단번에 조니를 찾아낸다. 어쩌면 사랑을 암시하는 색이 아닐까.
사랑이 아니라면, 그녀가 넬리를 위해 이렇게까지 헌신할 수 없다. 다정함의 온도가,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는데. 넬리를 위해 미래를 말하고 보호자를 자처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면, 그저 연민과 우정이었다면 가능했을까? 하지만 넬리는 조니를 선택한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바보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넬리는 가장 최악을 고른다. 과거의 망령에 휘둘린 채로. 맞지 않는 옷, 화장, 머리를 하고서는. 그저 가면을 덧쓴 줄도 모르고. 넬리가 너무도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생기가 없던 얼굴과 표정이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처럼 반짝이는 게. 사랑이 뭐라고, 대체 그게 뭐라고를 외치게 만든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며 행복해하는 모습. 비통한 얼굴의 레네가 교차되어 보여 더 그럴지도. 그녀는 한치 앞도 모른 채 내달리고 있었다. 레네는 그런 넬리를 보며 어떤 마음으로 자살을 선택했을까. 레네가 그린 미래에는 반드시 넬리가 있어야만 했는데.
넬리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깨질 수밖에 없다는 걸 영화를 본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랑이 사랑만으로 존재한다면 세상에 아픈 일과 힘든 일 따위는 없을 텐데. 자신이 믿고 싶었던 거짓들을 끌어안고, 넬리는 여전히 순수한 얼굴과 눈빛으로 사랑을 말한다. 조니가 자신이 살기 위해 넬리를 밀고했던 것이라면, 거기서 그쳤다면 오히려 이해라도 할 수 있었을 테다. 그는 오로지 돈을 위해 넬리를 이용했다.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당신과 함께 있기 위해 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겪고, 뭘 포기하면서까지 돌아왔는데. 넬리의 그 순수한 사랑. 그 사랑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면 감히 그런 식으로 대하지 못할 텐데. 그럴 수 없을 진데. 그녀의 사랑은 대가가 없다. 조니가 치루어야 하는 비용이 없는, 순애이다. 이 순수한 사랑과 호의, 무한한 신뢰는 내가 반려동물을 통해서만 받았던 애정이다. 무한한 애정, 신뢰, 그래서 미안하고 고맙고 애틋해지는. 이 무게와 온도가 없으면 이제 무섭기까지 하다. 그런 사랑인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자신을 태워 사랑을 하는 그녀를 현실로 붙잡아준 건 레네의 자살 후 레네가 쓴 편지, 조니의 행적들이다. 왜 이걸 먼저 보여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어쩌면 순수한 넬리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비밀에 부치려고 했던 것일까. 상처 없이는 성장할 수 없을 텐데. 넬리는 이내 모든 것을 똑바로 응시한다. 조니가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님을, 밀고자였음을, 배신자임을.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이 필체, 이 얼굴, 이 걸음걸이마저도 모두 다 내 모습이에요. 한 번만 알아봐주면 좋을 텐데, 끝끝내 알아보지 못하는군요.'라고. 스스로의 사랑을 끝낼 준비를 하며, 넬리는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Speak Low'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했던가. 깨달은 그녀에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지난 사랑의 흔적, 폐허가 된 마음, 재가 된 것들, 그 속에서 넬리는 새로운 길을 걸어나간다. 사뭇 비장하게 보이는 이 모습은 마치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제 당신을 기억 속에 묻어두고 나아갈 거예요. 모든 것을 불태워 사랑했으니 후회는 없어요.' 라고. 사랑에 빠진 1인극은 이제 끝났다. 막을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1인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