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쯤 우울감과 외로움에 빠진 적이 있다. 워커홀릭이던 내가 회사를 쉬게 되자 그 빈자리를 외로움이 차지하게 된 것 같았다. 그 감정이 물감이 번지듯 번져갈 때쯤 식물을 키워보는 게 어떠냐는 친구의 조언이 떠올랐다. 식물, 지금도 그때도 여전히 어려운 것. 선인장과 다육 식물도 죽인 전적이 있던 나에겐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정보의 바다를 헤엄쳤다. 그 긴 헤엄 끝에 발견한 것은 싱고니움이라는 관엽식물이다.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을 흔히 식집사라 부른다. 그들 사이에서 싱고니움은 순둥이라고 불린다. 물만 잘 줘도 쑥쑥 잘 큰다나 뭐라나? 지난번처럼 쉽게 죽이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식물등과 영양제, 흙을 준비했다. 중고거래 플랫폼인 ‘당근’을 이용한 것도 이 식물 덕분이다. 처음으로 들인 싱고니움은 ‘밀크 컨페티’라는 종류였다.
연한 녹차라테 색의 이파리에 딸기 우유 색상의 점박이들이 콕콕 박혀있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잘 키우고 싶은 욕심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돌봤다. 광합성을 하지 못할까 봐 식물등을 수시로 켜고, 건조한 겨울에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가습기까지 켜는 수고로움까지 더해졌다. 그 과정에서 뿌듯함마저 느꼈다. 잘 키우고 싶다는 욕심은 어느새 좋아한다로 변화했다. 수고로움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몇 주가 지난 뒤 금방 성장한 녀석에게는 애틋함과 함께 에너지를 얻었다. 그제야 길가에 피어 있는 잡초들도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무도 눈을 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버티고 또 성장하는 생명력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나 스스로의 강박이 조금은 완화되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도 조금씩이지만 나아지는 중이 아닐까. 지금은 그 과정을 밟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거기까지면 좋았을 걸, 씩씩하게 크던 녀석은 어느 날 잎이 노랗게 변색되며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당황스러움이 들이닥쳤다. 왜? 어째서? 또 죽이는 거야?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혼자 끙끙거리다 도움을 구했다. 도움의 손길은 여기저기서 도착했다. 정답은 분갈이와 영양제였다. 식물의 언어는 참 신기하다.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와 몸짓이다. 이럴 때면 식집사들의 소통능력이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보통의 섬세함과 꾸준함이 없다면 사랑을 주지도, 키우지도 못할 것이다. 순둥이라고 불리는 싱고니움도 내게는 어려웠는데 말이다.
다행히도 싱고니움은 새 화분에 잘 자리 잡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나는 아직 이 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을 잘 모른다. 습도와 온도는 어떤 게 적당한지, 물을 주는 알맞은 시기는 여전히 느리게나마 배우고 있다. 고마워, 느리고 배울 게 많은 반려인을 인내심으로 기다려줘서. 나는 이 인내심 많고 무던한 친구를 만나 외로움을 덜어냈다. 이제는 그 친구의 언어와 몸짓, 세계를 이해해보려 한다. 그때가 오면 이 친구에게 예쁜 이름을 붙여줘야지. 그 반짝거리는 생명력을 담은 이름으로. 조금만 기다려줘. 너무 늦지 않게 따라잡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