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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환 Jan 01. 2019

3# 우린 왜 좌우로 나뉘었을까.

청년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모두의 정치'

 필자는 개인적으로 보수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를 좋아한다.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군 가산점 논쟁이 뜨겁던 2007년, MBC 방송사의 토론 프로그램인 ’ 100분 토론’에 패널로 출연하여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속 시원했던 그의 사이다 발언을 듣고 나서부터다. 상대 패널을 향해 던지던 ‘가고 싶은 군대가 어딨어요?‘ ’ 남자 군에 가있는 동안 2점을 더 못 땁니까?‘ 등의 그의 발언은 당시엔 통쾌를 넘어선 마음을 뚫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당시엔 그도 토론프로에 막 출연하던 초기였기에 다소 거친 발언으로 사회자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하는 대표적 보수논객이 되었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그는 논리와 명분을 가진 건전한 보수다. 필자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강의와 토론 영상은 늘 챙겨보았고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보수의 입장과 논리를 알게 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대표적 진보논객인 유시민 작가도 필자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인사다. 그의 촌철살인적인 발언을 듣고 있자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토록 정확하고 명료하며 논리적인 인사는 흔치 않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편파적이지 않고 중도적 입장에서 사안을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그의 태도가 본받을 만하다.   

  

 대한민국은 정치계 진영을 나누는 의미로 좌파와 우파 또는 진보와 보수를 자주 언급한다. 좌파를 진보, 우파를 보수라고 혼용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정치 진영을 호칭하는 단어 가운데 좌파란 단어는 우파가 자주 쓰고 진보란 단어는 좌파가 자주 쓰는데 단어의 의미에서 느껴지듯 좌파는 왠지 불순한 집단인 것 같은 느낌이 있어 우파에서는 이 단어를 많이 쓴다. 


 역대 우파진영을 대표하는 인사들도 상대 진영을 지칭할 땐 좌파란 말을 많이 썼다. 반대로 보수란 단어는 왠지 딱딱하고 권위적인 느낌이 있어 좌파에서 우파진영을 지칭할 때 많이 쓴다. 흔히 ‘우리 부모님은 보수적이야’라고 말하면 엄격하고 틀에 박혀 있는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보수란 단어보다 진보란 단어가 왠지 개방적이고 자유로울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단어는 정치 진영을 호칭하는 단어일 뿐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모두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그럼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기준 혹은 개념은 무엇일까. 좌파는 현 제도에 대한 모순을 찾아내고 보완하려는 정치적 입장과 성격을 띤다. 따라서 현 제도권 안에서 도태되고 소외된 계층을 보듬는 정책을 주장하며 또한 다수가 원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존의 법도 바꿀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민주사회의 제도는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기에 좌파는 늘 소수 약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즉 기득권 반대편에 서있는 진영이다. 반면 우파는 가급적 현 제도를 유지하고 만약 법을 바꾸더라도 급작스러운 변경이 아닌 점차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중시한다. 


 법과 제도의 급작스런 변화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며 현 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이기에 기득권층은 우파의 논리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급작스런 사회의 변화는 기득권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나름의 논리가 있기에 어느 것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법이란 것은 공동체 모두가 안녕을 누리기 위해 만든 것이기에 다수가 원하면 바꿀 수 있다는 논리도 맞고 급작스럽게 법이 바뀌면 그동안 유지해온 관습이 무너져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논리도 맞다. 이러한 양측 진영의 논리는 현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과 내가 위치한 사회적 지위에 따라 지지하는 입장이 나뉘곤 한다. 


 대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현 제도를 옹호하는 우파의 논리를 지지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변화를 갈구하기에 좌파의 논리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학생과 학부모의 경우 교육제도 개편안이 나에게 유리하면 지지하고 불리하면 반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몇 년 전부터 이슈가 된 페미니즘도 구제도 속에서 억압받아오던 여성들이 사회에 대한 반감과 계몽으로 권익쟁취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 의사를 들어낸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의 상징 부처인 여성가족부의 등장과 페미니즘의 이슈화는 늘 좌파가 집권한 시기와 맞물린 것도 이러한 이유다. 우리가 잘 알 듯 여성가족부는 대표적 좌파인사인 故김대중 대통령 정부 시절 생겨난 부처다.     


 정치 진영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에는 진보와 보수가 있으며 각 진영의 정치철학과 이념을 바탕으로 집권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런데 국민을 위한 정책을 무기 삼아 건전한 토의를 하면 좋으련만 국민의 눈에는 항상 정책이 아닌 진영논리와 정치 프레임이 보여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정치 프레임이란 상대 진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덮어씌워 진영 자체를 부정한 집단으로 몰아가는 정치공작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친일과 종북이 있으며 한국인이라면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공격하기 위한 정치 단어이기도 하며 분명한 건 대한민국의 입장에선 둘 다 좋은 의미는 아니다. 


 보수진영은 진보진영을 종북몰이, 이른바 색깔론으로 공격한다. 진보정권인 문재인 정부의 개헌 논의 당시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려고 하냐는 정치공격과 동네 아이들에게 돈을 주도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부르고 다니게 했다는 언론보도는 보수가 근 70년간 진보진영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던 정치 프레임이다. 진보진영도 이에 지지 않는다. 보수인사들을 스스로 나라도 건사하지 못하는 사대주의 자라하고 가진 자들의 편만을 들며 보수의 상징으로 통하는 박정희前대통령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인사임을 드러내고 그의 일본 이름인 다까끼 마사오를 미디어에서 서슴없이 말한다. 또한 친일을 이슈화시키기 위해 위안부 문제, 반민족 행위 과거청산 문제를 주장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이러한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친일보다는 종북에 대한 반감이 더 크다. 지금의 1040세대는 일제 감점 기와 6.25 전쟁 후의 분위기를 겪어 보지 못한 세대다.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반감이 흐려질 세대임에도 유독 종북에 대한 반감이 남아 있는 이유는 친일은 외세의 침략을 도운 반민족자에 대한 증오이기에 그 대상 범위가 좁고 선택적이지만 종북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운 존재이자 사람의 생각을 잠식하는 이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친일에 대한 증오심은 시간이 갈수록, 또 피해 당사자들이 죽고 없어지면 희미해지기에 점차 멀게 느껴진다. 이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나면 더 이상 친일에 대한 반감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친일과 종북은 각 정치 진영이 상대 진영을 공격하려는 수단일 뿐 국민정치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는 민생이다. 둘 다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할 뼈아픈 역사로 인식하되 민생정치와는 분리하여 보아야 하며 이것이 정치 진영의 집권 수단으로 이용되면 그 역사적 의미가 퇴색되고 왜곡된 역사인식의 우려가 있다. 


 진정한 의미의 좌파와 우파 그리고 진보와 보수는 정치철학에 대한 견해이지 국민정서를 끌어들여 서로에게 정치 프레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다수가 우월하다고 믿는 현 제도의 모순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모순을 극복하여 현 제도를 보다 나은 제도로 발전시켜 나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건전한 토론과 비판을 해야 하는 것이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의 역할이다. 그저 국민 지지를 얻고 있는 상대 진영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정치철학적 비판이 아닌 정치 프레임을 들먹이는 낡은 정치에 이젠 신물이 난다.      


 나와 생각과 입장이 다르다 하여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행위는 나 자신의 발전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를 위한 순수한 비판을 수용하고 모순점을 고쳐 나갈 때 더욱 성장할 수 있다. 독자는 좌파와 우파의 논리 중 어느 것을 지지하는가. 그리고 지지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자신만의 철학이라기 보단 그동안 정치인의 발언과 미디어를 통해 들은 정보에 의해 흔들려왔다는 자각을 하게 될 것이다.   

  

 현 제도가 불합리하다며 대안을 주장하던 좌파의 논리가 막상 제도화되면 결국 그 제도를 지키기 위한 우파로 변이 되며 구제도의 철폐로 기득권을 잃은 우파는 새로운 기득권을 얻기 위한 좌파의 입장으로 투쟁에 돌입하게 되므로 세상엔 영원한 좌파도 우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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