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 ‘작품’과 ‘유물’을 구분 짓기 시작했다. 우선 ‘작품’은, 내게 재잘재잘 말을 걸어오는 것들을 이른다. 나는 이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어. 나는 이 시대 작품이야. 작가는 나를 통해서 이런 얘기를 전하고 싶었어. 이러한 말들을 걸어오는 것들. 그렇게 들려오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고뇌나, 감정에 대해서 고찰하게 된다. 작품은 작가들이 그렇게나 열심히 전하고자 했던 그 말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누군가의 감정’에 이입하게 한다.
‘유물’은 말을 걸어오지 않는 것을 이른다. 단순히 감상, 예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들과 달리 ‘유물’들은 대개 실제 사용되었던 ‘물건’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그들이 오랜 세월 품어왔던 사람들의 삶을 펼쳐 보일 뿐이다. 그래서 유물은 철학이나 존재 등 거창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 누구의 주관도 섞이지 않은 삶 그 자체를 통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내 나름대로의 나눈 이 두가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모두 ‘직접 가서 봐야만 의미있다’는 것. ‘작품’은 실제 작가의 터치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를 느껴야만 하고, ‘유물’ 또한 실제 마주해서 그 사용감까지 느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그래서 더욱 자주 직접 마주하러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생각때문에 가끔씩 방송이나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책 <고궁의 옛 물건>은, 작품은 몰라도 유물은 꼭 직접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그 맛을 느낄 수 있겠다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고궁박물관 시청각연구소 소장인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고궁 박물관의 186만점 중, 시대별로 하나씩 총 18개의 유물을 꼽아서 우리에게 소개한다. 각 유물 별로 쓰임새는 물론, 외관상 디테일, 해당 유물에서 읽어낼 수 있는 시대상, 유물 주인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모두 풀어서 설명한다. 그런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있자면 유물이 내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해당 유물을 사용하고 있는 혹은 주문했을 누군가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특히나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빛을 발해, 내가 직접 유물을 마주한 것 보다 더 당대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했던 두가지는 청동 솥과 병마용이었다.
몇천 년 전 청동기가 청색이 아니라 구리색, 즉 황허와 황토가 뿜어내는 찬란한 금황색인 것을 몰랐던 것 같다. 이것은 도금한 것이 아니라 동과 주석 합금의 본래 색이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청동을 '금(金)'이라 하고 청동기에 새긴 명문을 '금문(金文)'이라고 불렀다.(…) 9개 솥이 화로에서 금방 나온 모습을 상상해보자. 육중하고 단단한 형체 위에 정교하고 섬세한 무늬가 가득하다. 9개 솥이 일자로 종묘에 늘어서 있다. 복도 기둥을 통과한 햇빛이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처럼 솥의 측면을 비추면 무늬가 부각되면서 찬란한 금색이 그윽하게 반사된다. -「국가의 예술」중에서
나 또한 처음 청동 솥 사진을 보고, 어떻게 하면 이 솥이 ‘국가의 위엄’을 나타낼 수 있겠나 하고 심드렁하게 생각했기에 위 대목을 있는 순간 크게 충격 받았었다. 당연히도, 당시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다른데. 나는 왜 너무 당연하게도 지금의 모습으로 당대의 쓰임과 모습을 평가했을까. 작가의 말을 따라가며, 황금 빛으로 빛나는 청동 솥이 늘어서 있는 것을 상상하니 그제서야 그 당시 사람들이 솥에서 느꼈을 위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진은 고궁박물관 소장 작품이 아님
사람들은 진시황이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이 군대를 만들었다고 알고있다. (…)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진시황이 자신의 권위를 부각시키고 싶었다면 왜 거대한 자기 조각상을 세워 사람들이 존경하고 우러러보게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흉악함과 피비린내로 자신의 허약과 허둥대는 모습을 덮었다. 그는 죽은 뒤에도 아기처럼 보호받아야 했다. 제시카 로손은 이렇게 말했다. “진시황은 유명한 병마용 대군의 보호를 받고있다. 다른 여러 고분들은 석문과 거대하고 무겁고 정교하게 조각된 돌덩어리로 폐쇄 되어있다. 죽은 자들은 바깥 세상을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다. -「거상의 부재」중에서
지금까지 당연하게도 ‘진시황의 군대’, ‘진시황의 권력자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진시황의 유약함의 상징일 수 있다니. 그렇다면 토우 하나하나가 다 각각의 표정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말이 됐다. 단순한 권력 자랑은 인간 형상의 ‘더미’로도 충분하지만, 보호받기 위해서는 ‘더미’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이 필요하니 말이다. 이렇게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나 혼자 박물관에서 몇줄의 설명에 의지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유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유물은, 직접 가서 보는 아우라만큼이나 옆에서 설명해주는 스토리텔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물론 직접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 18편의 유물과 마주한 적이 없음에도 벌써 친숙한 느낌이 든다. 시대별로 한 점씩, 중국 역사를 톺아줬기에 현재 '중국'이란 이름으로 명명된 대륙의 삶을 들여다 본 것 같기도 하다.
유물이 가진 이야기의 힘을 알게 된 만큼, 앞으로 내가 직접 마주하지 않았기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다양한 유물의 이야기들에도 귀를 기울이길. 그래서 더 다양한 삶을 마주할 수 있게되길 바라본다.
[책 소개]
북경 자금성 안에 위치한 고궁박물원은 우선 그 방대한 소장품 숫자에서 방문객을 압도한다. 소장품은 186만 점이 넘는다. 한 연구자가 하루에 5점씩 본다고 가정했을 때 전부 보는 데 1,000년이 걸리는 양이며, 매년 바꾼다 해도 전체 소장품의 0.6%밖에 전시하지 못하는 숫자이기도 한다.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근무하는 저자가 수많은 고궁의 소장품 중 가장 대표적인 옛 물건을 고르고 골라 18주제로 요약했다.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박물관 전시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릇과 그림, 가구와 옷들이 '후!' 하고 멈췄던 숨을 쉬고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엄정한 학자이면서 다큐멘터리 예술 감독이기도 한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더 이상 박물관이라는 곳이 옛 물건들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 곳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색과 소리를 회복한 옛 물건들이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칼과 검을 휘두르고, 이야기를 하고,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웃는 것이 보인다.
고궁의 소장품을 '유물'이라 부르지 않고 '옛 물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자가 유물이 품은 시간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모든 소장품에는 여러 왕조의 비바람이 수렴되어 있고, 시간의 힘이 응축되어 있다. 그 광대한 물질의 세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모래 한 알이 사막에 파묻히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장자는 아침 버섯이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매미가 봄과 가을을 모른다고 했다. 궁전의 옛 물건도 그와 같은 가르침을 준다. 이 책은 중국에서 발간된 '주용의 고궁 시리즈' 9권 중 한 권으로 탁월한 이야기성과 시각적 묘사와 시적 문장으로 유물에 담긴 내밀한 아름다움을 발견해서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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