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꿰어온 역사의 한 땀 한 땀
“지금 책에서 눈을 떼고 자기 자신을 보라. 옷으로 감싸인 당신의 몸이 보일 것이다. 기차나 지하철 좌석에 앉아있을 수도 있고…(중략)…이불 속에 쏙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들은 모두 직물, 펠트, 편물 같은 천으로 만든 제품이다.”
총보다 강한 실의 서문이다. 서문을 읽자마자 몸을 감싸고 있는 옷과 앉아있는 의자의 쿠션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정말 천에 둘러싸여 있구나. 실, 그리고 천에 관한 책의 서문으로서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옷을 입고 있는 한, 아니 나체로 있더라도 우리는 천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공기처럼 당연하지만 소중한’이란 진부한 표현이 있을 정도로 당연한 것은 그만큼 소중하다. 천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인류에게 천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류가 실을 만들기 시작한 이래로 천은 늘 인류와 함께하며 역사를 만들어왔다. 책 <총보다 강한 실>은 실의 관점에서, 자신이 떠온 역사의 한 땀 한 땀을 면밀히 들여다본다. 나는 그 중에서도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역사의 몇 땀을 여기 소개해보고자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도덕적 이유를 제외하고서라도 지금 당장 야외에 옷을 다 벗은 채로 나가보라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이 따스해진 3월의 오늘도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기에는 충분히 따듯하지 않은 날씨다. 하물며 겨울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 불가능하다면, 혹한의 시베리아는 어떨까? 긴 겨울을 가진 북유럽은? 결국 우리는 아니 대부분의 인간은 천이 없었다면 지금 살고 있는 땅에서 살아남지도 못했다는 얘기다. 애초에 인간은 최초로 진화했던 온대 지방을 제외한 곳에 살기에는 부적합한 존재다. 그런 인간이 현재는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부적합할 수 있던 존재를 현재 살고 있는 이 땅에 적합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직물이다. 직물의 발전사와 인류의 발전사가 궤를 같이 하는 것은 필연이다.
조지아의 ‘줏주아나’라는 이름의 동굴에서 발견된 섬유는 인간이 약 32000년도 더 전에 실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실이라는 도구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옷을 지어입기 시작하며 인간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동해 세계 곳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이는 인류발전의 시작이 됐다.
다양한 비단길의 경로. 비단을 타고 수많은 문화들이 흘렀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넘게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그 옛날 말과 낙타만으로 오갔다는 이야기는 놀라운 것을 넘어 참 낭만적이다. 비단길. 중국의 비단이 로마에 닿기까지의 길을 가리키는, 이름조차도 아름다운 이 교역로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비단을 향한 욕망이 드넓은 초원과 사막을 뚫고 8000km 이상을 여행할 만큼 강렬했다는 것을 의미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길을 따라 전해진 것은 비단만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은 몰랐겠지만 그들은 동서양의 사상과 예술 양식, 종교, 심지어는 질병도 전파하고 있었다. 서신과 소식 또한 이 길들을 통해 전해졌다.”
기원전 2세기부터 비단을 지고 움직이는 상인들을 통해서 양쪽에 전해진 것들은 동서양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아마 이 비단길이 없었더라면 두 세계는 훨씬 더 단절된 채로, 더디게 발전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했기에 당연히 쉬어갈 곳들이 필요했고,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들이나 오아시스 주변에는 도시들이 생겼다. 해당 도시들은 부를 축적해 화려하게 번성했고,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상인들이 공존했던 만큼 다양한 문화들이 잘 어우러졌다. 심지어는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종교들조차도 함께 공존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은 ISIS에 의해 파괴된 시리아의 팔미라다. 팔미라는 ‘모래 속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그리스-페르시아-로마-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모두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이야기를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아름다운 직물에 대한 욕망인 것이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정확히 어떤 천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만 해도 ‘혼용률’이라고만 적혀있지 정확히 무슨 직물들로 이뤄진 옷인지는 표기해주지도 않는다. 수많은 합성섬유 및 천연섬유를 섞어서 싸고 튼튼한 옷을 대량생산하는 현대사회에서 ‘합성섬유’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렇게 입어대면서도 우리는 합성섬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자는 레이온 공장을 들어 합성섬유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말한다. 레이온을 합성하는 과정에서는 ‘이황화탄소’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력을 잃게 되거나 식욕을 잃게 되는 증상부터, 호흡 곤란을 야기하거나 정신질환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레이온이 벌어들이는 돈은 막대했다는 것이고, 그 공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보통 건강을 희생시키더라도 하루하루 돈벌이가 급한 저학력의 빈곤층이었다는 사실이다. 이황화탄소의 치명성이 속속들이 밝혀지는 와중에도 기업들은 연구진행 속도를 늦추려 하며 책임을 회피했고 아픈 몸을 이끌고도 계속해 출근한 수많은 일꾼들이 그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도 현재는 공장에서 허용되는 이황화탄소의 양에 대한 안전기준이 설정됐지만, 합성섬유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5년 4월 24일 수요일 아침 9시가 되기 3분전, ‘라나 플라자’라는 커다란 8층짜리 건물이 갑자기 그리고 완전하게 무너졌다. …당시에 건물 안에는 3,122명이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의류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노동자들이었고 아이를 데려온 사람도 많았다."
방글라데시에서 1,134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참사는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애초에 연못을 메운 땅이라 공장을 짓기엔 기반이 터무니도 없이 약했는데도 증축할 수 있을 만큼 증축한 상태였고, 붕괴 이전에 구조적 결함을 발견했음에도 같은 건물에 있던 상업시설들 직원은 대피시키면서도 공작 직원들은 업무를 시켰다. 상대적으로 더 빈곤하고 약한 이들만을 사지로 내몬 것이다. 이 악몽을 겪고서도 생존자들은 또 다른 의류공장으로 가서 일해야만 했다. 의류공장이 아니고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방글라데시의 싼 인건비에 의존해 옷을 만들어내던 거대 브랜드들은 유독 이 사건에는 침묵했다. 우리가 ‘싸고 좋다’며 좋아했던 옷들은 이렇게 약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착취해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현재, 우리는 합리적인 기준에서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직물을 생산하고 있다. 예컨대 2010년에 생산된 옷은 총 1,500억 벌인데 이 정도면 지금 살아있는 모든 인간에게 새 옷을 20벌씩 제공하고도 남는다.”
싸고 손쉽게 옷을 만들 수 있는 합성섬유의 발달과, 그와 함께 커진 인간의 욕망은 옷을 과잉으로 많이 찍어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합성섬유는 자연으로의 분해가 쉽게 되지 않아 ‘플라스틱 쓰레기’가 될 뿐 아니라, 폴리에스테르의 경우 입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섬유가 떨어져 나와 지속적으로 환경을 오염시킨다. 우리가 빨래할 때 떨어지는 플라스틱 섬유들이 바다로 흘러가 바다생물들의 몸속에 플라스틱이 쌓일 정도라고까지 한다.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닳아 없어지지도 않을 만큼의 옷을 소비하고, 그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업들은 자연 자원을 소모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렇게 생산된 옷들은 또 빠르게 폐기물이 되어버리고…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이제는 빠져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어떤 천으로 이뤄졌는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무조건 ‘새로운 것’들만을 원하며 소비하기보다는 중고 옷매장을 이용하거나, 친환경 소재의 옷을 알아보고 구매하는 등. 이젠 변화가 필요할 때다.
카르파르 네츠허르 <레이스 짜는 여인>
중국의 비단부터, 서양의 레이스까지 직물을 만드는 일은 ‘여성의 일’로 치부돼왔다. 아테네에게 도전했다가 거미가 되는 운명의 아라크네 설화에서도 알 수 있듯 전쟁의 여신인 아테네조차도 베는 기본으로 짤 수 있을 정도로 직물을 다루는 일은 여성들의 기본 소양으로 여겨져 왔다.
여기서는 몇 가지 함의를 읽을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옷을 만드는 일’은 ‘가족을 챙기는 일’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옷을 짜서 가족들을 입혀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집안일이 그렇듯, 생산적인 일로 여겨지지 않고 경시하기도 쉬웠다. 가족을 위해서 하는 집 활동이라며 무시하기에 최적의 조건인 것이다.
두 번째는, 실을 만들고 옷을 만드는 일은 집안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늘 여성들이 집 밖을 나서면 ‘문제를 일으킬까’ 혹은 ‘나쁜 물이 들까’ 걱정했던 남성들이 여성에게 부여하기에는 최적의 일거리 아니었을까. 카스파르 네츠허르가 그린 그림에서 빗자루가 잘 정돈된 집안을 의미하고, 버려진 신 한짝이 밖에 나갈 의사가 없음을 의미하고, 그게 당시 관람자로 하여금 만족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에서 여성을 집안에만 두고자했던 남성들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직물짜기가 여성에게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쳤다는 것은 아니다. 상술했듯 직물은 그간 평가절해 돼 왔을 듯 인간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며, 한 땀 한 땀 그걸 생산해냈던 여성들의 노동력은 고귀하다. 또한 직물을 짜내는 것은 여성들에게 그나마의 경제력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지금까지 그 고귀한 노동들이 평가절하 돼 왔다는 점과 여성의 일거리를 직물짜기에 한정한 그 속내가 답답할 따름이다. 책이 ‘실이 총보다 강하다’고 선언한 만큼, 여성이 해왔던 직물짜기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시급하다.
내가 여기서 언급한 것들은 극히 일부로, 책에는 13개의 주제로 실이 꿰어온 우리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실은 생존을 위해, 창작을 위해, 보존을 위해, 사치를 위해 등 다양한 이유로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지금의 우리를 있게할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잘 담고있는 그릇인 실. 이 책을 통해서 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총보다 강한 실
- 실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 -
지은이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옮긴이 : 안진이
출판사 : 윌북
분야
역사 / 세계사
규격
145*220mm
쪽 수 : 440쪽
발행일
2020년 02월 10일
정가 : 17,800원
ISBN
979-11-5581-258-7 (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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