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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ho Sep 13. 2022

식물을 잘 알지 못하는 식집사

앎과 사랑은 별개라서





     “고무나무는 절대 분갈이를 해주면 안 돼!”

    아이가 제 아빠에게 단단히 일러둔 말이다. 화분 모양도 유행을 타는지 처음 이 친구를 집에 들일 때에는 저렇게 생긴 화분이 많았는데 요즘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8년 전에 산 길고 네모난 화분을 분갈이해주면 어떨까 얘기했던 적이 몇 번 있다. 

    너무 길고, 너무 네모야.

    고민 끝에 몇 년 전, 똑같은 화분에 심겨있던 야자나무를 먼저 새 화분으로 옮겨심었다. 길고 좁은 화분 속에서 꽉 차게 엉켜있는 뿌리들을 털어내 넓은 곳으로 옮겨주면서 이제 쾌적하게 살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넓은 집에 살고 싶은 건 사람의 욕망만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야자나무는 새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옮긴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하루가 다르게 갈색빛으로 변하는 야자잎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뭐가 문제였을까. 식물이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갑작스러운 식물의 죽음에 아이도 많이 놀란 눈치였다. 

     ‘화분을 바꿔서 죽었잖아.’ 아이는 같은 말을 자주 했다. 말 속에 생략된 단어‘멋대로’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 후로 고무나무 분갈이는 꿈도 못 꾸게 되었다. 

     ‘화분 상태가 별로야.’ 지나가는 말로라도 남편과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 어디선가 아이가 달려와 ‘안돼, 안돼. 옮기면 안 돼!’라고 역정을 낸다.     


    뱅갈고무나무와 야자나무는 우리 집에 온 첫 식물들이었다. 처음에는 고작 식물 하나를 집에 들이는 일이 별건가 싶었다. 생화를 사서 화병에 꽂아두고 어여삐 여기다가 시들면 버리는 것과 비슷한 과정일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화분에 담긴 식물은 생명체였다. 물과 볕을 충분히 주면 우리와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낼 수 있는 존재였다.      


    우리 가족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습관처럼 화훼단지에 간다. 그곳에 가면 모르는 것 천지면서도 굳이 알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아름다움을 느낀다. 흙에 꽂힌 팻말에 의지해 이 친구는 이런 이름이다, 이만큼 물을 먹고 산대, 하며 얕은 정보만을 얻을 뿐이다. 단지 안을 몇 바퀴 돌고 돌다가 마음에 남는 친구가 생기면 집으로 데려온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정성껏 분갈이를 해주고 아이는 옆에 앉아 흙을 만지며 조잘조잘 떠든다. 

    나는 주로 집에 혼자 있을 때 식물들에 말을 건다.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길을 열어준다. 흙을 만져보고 너무 말랐을 때만 목을 축일 정도만큼 물을 뿌려준다. 과습으로 뿌리가 썩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담아 잎을 어루만진다. 식물들에 좋은 말을 해주면 더 잘 자란다고 그러지 않았나. 아이를 대하듯 귀하고 고운 말을 속삭여준다. 

    “고마워. 오늘도 예쁘네. 기특해.”

    말 못 하는 식물은 기쁨도 아픔도 제 몸으로 말한다. 우리가 알아차려 주길 기다린다. 산과 들에서 자라게 두지 않고 멋대로 데려왔으니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믿으면 된다. 지레짐작하여 흙을 파헤쳐선 안 된다. 우리 집 어린이도 안다. 함부로 분갈이하면 안 돼.

    그런 마음으로 집에 들인 식물들이 베란다를 가득 채웠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 부족한 식집사이지만 잘해주고 싶은 마음만은 큰 식집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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