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라이팅 클럽을 읽으며, 할 말이 쏟아질 것처럼 그득 들어찼다가, 추석을 지내는 동안 스르르 사그라들어버렸지 뭐야. 무슨 거품처럼. 나조차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없이 말이야. {어릴 적 그 책}이란 제목과 표지가 끌려 연휴내내 읽었지만,
읽기 전, 잔뜩 '이런 이야기를 할 거야, 저런 이야기를 하려나?' 했던 마음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내 근원은 동화책을 마음껏 사줄 형편이 못 되는 젊은 엄마가, 호기심 많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또 한 번 떠올리게 되는 일이었어. 똘똘뭉친 실타래같은 내 열패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콧잔등 시큰하게 깨닫는 일이 되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겠니? …
아직도 친구 집 책장 앞에 서서 어떤 책을 읽을까 고르던 때가 눈에 선한데, 그때 무슨 일인지 책을 빌리지 못했어. 할 수 없이 돌아와 집에서 이미 늘어질대로 늘어진 이야기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도 기억나는데, 그때 왜 빈손으로 돌아왔었는지는 기억이 안나.
어른이 되어 엄마에게 그때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가 그러더라고. 내가 그때 힘없이 터덜터덜 돌아오길래 엄마가 왜 이리 일찍 왔냐고 물으니, 그 집 자매들이 집에 가라고 하더래. 자기들 엄마가 내게 책 빌려주지 말라고 했다고. 그 말을 하면서 어린 내가 너무 당연한듯 체념하는 그 모습이 내게는 지워버리면 그만인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엄마에겐 가슴팍콱 들어막히는 일이었나 봐. 얼마 뒤 나에게도 유일한 그림책 전집이 생겼었는데, 알고 보니,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물어물어, 요즘 말하는 가성비 좋은 출판사의 책을 구입해준 거였던 거 있지. 월부(지금의 할부)조건, 사은품 유무, 구성 등등. 지친 모습으로 일터에서 돌아오신 아빠에게 은근 슬쩍 팜플릿을 보여주며 엄마가 '현이 이 책 사줬어요.'하고 운을 떼자마자 평소에도 소처럼 눈이 큰 아빠가 서너배 더 커진 눈으로 '뭐? 이사람이 정신이 있나?' 했던 건 기억 나. 그때 두 분이 심하게 다투셨거든.
<현아, 퍼뜩가자>책에서도 쓴 적 있지만, 그 뒤 그 전집은 내 보물 1호가 되었어. 유일무이한 전집이기도 했고, 엄마가 힘들게 사주신 책이자, 아빠의 수고가 꼬박꼬박 지불대는 책이어서인지 내가 그 책을 읽고 외우다시피 하는 모습이 두 분을 참 기쁘게 해드리는 것 같았어. 읽은 걸 흉내내며 구연하면 늘 근심으로 구겨진 부모님 얼굴도 환해지셨거든.
그래서 더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들었지. 동화전집은 내게 그런의미였어. 부모님의 근심,걱정, 열패, 기대 ,희망 ,같은 것들이 녹아 있는.
<어릴 적 그 책>을 읽기 시작 했을 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동화전집'에 관한 기억이 떠올라 울컥했어. 어렵사리 그 전집 이미지도 찾았거든. 30년도 훨씬 더 된 이야기인데, 표지 그림을 보자마자 세상에! 어제 막 읽었던 것처럼, 너무 생생한 거야. 정말 시간여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주책맞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 뭐야!
그런 마음이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되었으면..기대하며 책장을 넘겼어. 나의 유년이 이렇게 초라해질 줄은 모르고.
책을 다 읽고 한동안은, 나에겐 없던 작가의 단정한 시절들이 참 부럽더라. 아무 쓸모도 없지만, 나도 작가의 부모 같은 사람밑에서 자랐더라면..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고 있더라고. 그러다 이내 우리 부모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죄송스럽기 그지 없고. 그런 상황을, 자식에게 책 한 권 사줄 수 없는 상황을 일부러 만든것도 아닌데. 누구보다 속상하고 서러웠을 걸 아니까. 여전히 크게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고...
유난히 책 속 인물에 나를 투영시키는 걸 잘하는 게 이럴 땐 참 괴로운 일이지 뭐야. 작가는 작가의 인생이 있고, 나는 나의 인생이 있다고 의식하는 일이 좀 오래 걸렸어. 비슷한 시대를 살아서 더 그랬던 거 같아.
어제 루리 작가님의 <긴긴 밤>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생각했지만, 내게 동화를 읽는 다는 건, 그런 날들에 대한 보상인 것 같아. 웅크리고, 쓸쓸하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 헤매고 넘어졌던 날들을 있는 힘껏 끌어안아 다독여주는 작업 말이야. 그때 읽었으면 좋았을 책들을 여전히 그 상처들을 끌어안고 쳐박혀 있을 그 시절 나에게 들려주고 싶었어.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으면서. 이미 흉터로 남은 자리지만, 가만 가만 어루만지며 많이 아팠겠다...해 주고 싶고.
실은 ,<어릴 적 그 책>이후, 읽기와 쓰기를 거의 못했었어. 일기나 필사만 겨우 했을 뿐. 읽고 쓰는 일을 못하는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 남편이 일주일 내내 일하게 되면서, 모든 생활이 남편 위주로 돌아갔거든. 새벽같이 나가야 하는 남편때문에 식구 모두 10시 전엔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식구 모두 잠들면 조금이라도 읽고 자야지 다짐했던 마음은 피곤에 깔려버렸지. 어느새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더라. 아이 말이 나 요즘 코까지 그렇게 곤대.
오전에라도 잠시 짬을 내 이리저리 끄적이고 있으면, 어김없이 끊기는 일이 생겨. 아이가 찾든, 찌개가 끓어 넘치든, 남편이 갑작스레 전화해 부탁을 하든...그러고 나서 다시 펜을 들면 말이야, 바보가 된 기분이야. 머릿속이 정말 하얗다니까. 내가 왜 이 문장들을 써놨는지 기억이 안 나. 도통 모르겠어서, 다시 시작하거든? 다른 이야기로? 그러면 그것마저 또 끊겨버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사실 그렇게 쓰다 만 '라이팅 클럽'도 여럿있어. 진즉 썼더라면 이렇게 마지막 날까지 버팅기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오늘은 정말 단단히 큰맘 먹고 쓰고 있어. 사실, 좀 전에 한바탕 울고 나서, 오늘은 꼭 쓰리라 있는대로 작정하고 나서, 나를 또 막는 게 생기면 집을 나가버릴 거야! 마음 먹고 쓰고 있어. 이렇게 다시 쓰니까 알겠다. 나는 읽고 쓰는 일이 없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무뎌진 건, 아무것도 안해도 살만하네 느낀건, 진짜 내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는 걸. 주부, 엄마모드가 풀 가동된 로봇의 마음이었을 뿐.
이번 라이팅 클럽은 좀 많이 길다. 역대급인 걸.
사실 요즘 나와, 우리 가족들도 역대급으로 긴긴밤을 보내는 중이야. 뿔이 잘려 버린노든이, 자꾸 가슴아픈 일만 생기던 노든이, 내 남편같아 유난히 많이 울었다? 첫 번째 읽을 때, 두 번째 읽을 때. 그리고 어제 모임에서도. 그래도 남편에겐 아직 열심히 로봇모드 돌려대다 삐긋 거리는 나도 있고, 우리 아가들도있으니까. 이 긴 긴밤이 조금씩 짧아질 거라고, 곧 견딜만 한 날들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때를 고대하며, 너무너무 고되고 힘들어도, 흉터는 기어코 이야기를 남긴다는 말을 떠올려 볼게. 그래서 나도 내 이야기를 다시 써볼게. 긴긴밤이 너무 길고 힘들다고, 울고 있지만 않고, 어린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들려주고, 많이 쓰면서, 우리집 노든이랑, 우리 아가들이랑 천천히 천천히 걸으며 어느 날 발견하게 될 달빛 밝은 날의 진흙 목욕탕을 기대할게.
스며드는 달빛
유년 에세이 <현아,퍼뜩가자 점심 묵구로>를 지었습니다. 평범한 두 여자의 글쓰기 프로젝트 {라이팅클럽}을 꾸려갑니다.
말하기 보다 쓰기를, 쓰는 일 보다 더욱 듣는 일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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