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혁신 이론으로 바라보는
정말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전 요즘 <성장과 혁신>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많은 영감을 받고 있어요.
https://stratechery.com/2020/email-addresses-and-razor-blades/
위의 블로그를 보다가 너무 이해하고 싶은 문단이 있어서 주석까지 읽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저자는 산업에서 메기처럼 등장해 판을 흔드는 파괴적 혁신 기업은 어떻게 시장을 공략하는가?를 나름의 논리로 공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독 전이라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오버슈팅'(overshooting; 성능과잉현상)이 등장합니다. 이는 성능과잉현상을 의미하는 말로 풀이하면, 기술 발전속력이 인간의 기술 수용력이 커지는 속력보다 매우 빠르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흐른 그 이후부턴 인간이 기술 발전으로 직관적으로 얻는 한계효용은 사실상 0에 달하는 현상입니다.
예로 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에겐 스마트폰이 그러할 수 있겠네요. 수년 간 발전을 거듭해 이젠 신상품이 출시된다한들 그에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프리미엄을 당장 누리려는 마니아보단, 성능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저가모델을 흔쾌히 구입할 고객이 더 많은 시장. 주관적 기준에서 스마트폰 시장은 알뜰폰이 꾸준히 나오는 걸 봐 오버슈팅의 한 사례에 해당한다 생각합니다만, 동의하지 못하신다면, 이 밖에 생각나는 시장 - 노트북 시장 등 - 은 개개인별로 다양할 겁니다.
저는 '소비자 대상 직접판매 방식'(direct to consumer; D2C)의 발전을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봤습니다. 매번 단순히 모바일과 SNS, 영상 콘텐츠가 활개치며 성공했다 설명하기에는 늘 논리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또 기사에서나 보는 뻔한 말이라 듣는 이 맘에 와 닿지 않을 것 같았어요. 다행히 최근 여러 책도 읽고 - 특히 성장과 혁신 - 사색하며 퍼즐 조각처럼 D2C가 부흥을 맞이한 요인을 좀 더 논리적이고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혹은 조금 더 있어 보이게 설명할 수 있는)이 생기기 시작해 이 글을 써봅니다.
책에 따르면 파괴를 정의하는 방식은 2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로우엔드(low-end) 시장을 공략해 서서히 지배영역을 넓혀가는 방법과 이전엔 없던 소비를 만들어 내는 신(규)시장을 노리는 것. 후자가 저에겐 '신시장'이란 단어 때문인지 뭔가 스타트업스러운 혁신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혁신은 이 둘 중 어딘가에만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양가적입니다.
각각을 부연하면, 먼저 '로우엔드 파괴방식'은 서두에서 이야기한 한 산업에서 기술과잉으로 인한 제품의 오버슈팅이 일어나고 있을 때 유효한 방식입니다. 면도기 산업을 예로 들면, 많은 남자가 이전 모델에 비해 신규 모델의 날(razor)의 성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깊게 파보려 하지 않습니다. "면도기가 다 같은 면도기지"란 심산이 대부분일 것이고, 조금 더 까다로운 사용자는 신제품을 보고 절삭력이 좋아졌거나 자극도가 떨어졌겠지, 추정하며 한두 번쯤은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경험해보지요.
이 현상은 현재 면도기 산업 내 제조사가 오버슈팅하고 있단 방증으로, 소비자가 수용 가능한 기술 범위를 넘은 제품을 생산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겁니다.
이 경우 얼마든지 성능은 최신식보다는 떨어지더라도 염가의 간편제품이 나온다면, 그것이 시장을 뒤흔들 기회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왜냐면 이 경우 까다로운 소비자보단 무던한 소비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면도기 D2C 기업 '달러 쉐이브 클럽'은 바로 이러한 점을 전략적으로 활용, 기존시장에 성공적으로 침투했고 이것은 로우엔드 파괴의 한 예가 됐죠.
페이스북(혹 인스타그램)의 타게팅 광고를 통해 시장에 성공리 안착한 제품은 이런 특성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매트리스, 남성 구두 혹 스니커즈, 여성 가방... 그들 생김새와 기획의도는 프리미엄과 럭셔리를 지향할 지 몰라도 시장에 안착한 상황적 요인과 비결을 뜯어보면 로우엔드 시장에 관한 깊은 이해가 주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제품 성능이 충분해진’ 환경은 기술시장에서 공급이 풍요로워지는 걸 뜻하고 점차 혁신이 제품 그 자체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낮아짐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산업 초반 설계와 부품 제조에 핵심경쟁력을 가졌던 전통 브랜드 회사의 입지가 줄어듦을 의미하고, 나아가 혁신과 부가가치의 헤게모니가 제품에 머물기 보단 "채널로 이동함"을 뜻하기도 하겠네요.
그렇듯 이러한 파괴적 제품에는 늘 레거시 매체에 들어갈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품 특성처럼 파괴적 채널을 요구하죠. 그들에게 4년 전 (타게팅 광고를 장착한)SNS는 매우 적합한 파괴적 매체였습니다. SNS 이용자 연령도, 소비 성향도, 영상 콘텐트의 전달 방식도 상품을 설명하기에 모두 적합했고 이는 기존 브랜드를 위협할 정도의 큰 성장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파괴적 혁신 중 두 번째 방식에 해당하는 신시장 공략은 기존 산업군 제품을 사용하지 않은 비소비자를 데려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혁신이 따릅니다. 그간의 비소비 이유는 사용할 능력이(기술지식 혹 재산) 없거나 간편하지 않아서 등일 것이고 이때문에 신시장을 성공적으로 공략할 상품은 기술을 통한 간편성 제공을 특징으로 할 것입니다. 소니가 만든 포켓용 라디오나 초기 PC가 이 부류에 속하는데요. 그렇다면 앞서 로우엔드 파괴의 예로 든 몇몇 제품처럼 시중에 알려진 D2C 제품 중 이런 사례를 꼽아볼 수 있을까요?
당장 생각난 건 한 때 세간의 화제였던 남성 다운펌약입니다. 미용실에서 다운펌했던 남성은 많았을까? 통계조사를 본 적 없어 알 수 없지만 어림짐작하면 정말 많은 수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 수요가 온라인에서 이렇게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어떤 한 유저의 개인 경험에 비춘 직감이었고, 누구나 갖는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단 강렬한 욕망의 지침이었을 겁니다. 어찌됐건 이 상품은 미용실에 가서 어색한 미용사와 머리를 어떻게 해달라 주문하는, 귀찮고 쭈뼛쭈뼛거리기 싫은 남성층을 끌어들였고사용자는 집에서 간단한 시술만으로 (영상 속 모델과 다른 나를 한탄했지만서도)욕망을 나름 채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제품은 첫 번째 로우엔드 파괴 방식과도 맞닿아 있겠습니다. 미용실 가격보다 훨씬 더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를 제공했으니까요. 이처럼 다시 언급하지만 파괴적 혁신은 로우엔드 방식과 신시장 공략 방식 둘 중 어떤 하나에 딱 속하기 보단 혼재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앞선 파괴 이론에 있어 이해가 어려운 맥락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래 된 제조사나 대기업에서 많이들 시도 자체를 어려워하고 하더라도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제품 특성과 개량화에 기반한 상품 기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로 A란 브랜드가 매트리스를 안마기능과 온열기능을 앞세워 절찬리 판매 중입니다. 경쟁사 B사의 과장은 그걸 보고 이번에 출시할 신제품에 안마기능과 온열기능, 거기에 탈취기능까지 추가한 신상품을 기획하고 대량 홍보전을 준비합니다.
B사가 만든 상품은 파괴적 혁신보다는 기존 시장에서 한 단계 개량하는 존속적 혁신에 속하는데요. 이는 아까 초반에 말한 오버슈팅의 상황에서 현재 기술 수준에도 불만족하는 까다로운 (상대적 소수)고객 대상 장사에 기대를 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B사 과장에게는 지난 설문조사에서 "신제품에 어떤 기능을 추가하길 희망하시냐"는 질문에 탈취 혹 살균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답변을 다수 발견했기에 합리적인 시도였으나, 결과는 A사와 무한경쟁을 낳아 적잖은 비용을 내고 시장에 겨우 안착해야 합니다. 판매량도 이전 버전의 모델 대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앞선 사례는 많이들 보는 제품기획 프로세스로 시장조사를 통해 경쟁사 제품 특성을 비교하며 자사 제품의 포지셔닝을 정하는 과정에 해당합니다. 고객 설문이 주는 함정은 덤이죠. 사람들은 늘 인구통계학 정보에 따라 예상되는 니즈를 갖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50세 남성이라고 종이신문만 보는 것이 아니며 28세 남성도 지하철에 맘에 드는 이성 앞에선 지성미를 과시하고 싶어 종이신문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욕구’를 먼저 떠올리고 그에 ‘알맞은 행동'을 하는데요. 그렇기에 기사나 백서 속 통계는 상품기획에 있어 기막힌 단서를 주진 못할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데이터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돌아왔는데, 만약 B사 과장이 매트리스 소비는 '공간적 여유가 결여된 것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정의하고 매트리스에 접이식 간이 테이블을 내장해 기획했다면 어땠을까요?
주류시장의 특성에 몰입하기 보다, 매트리스와 함께하는 소비자 욕구와 행동에 초점을 맞춰 그 위에서 식사하고 편하게 TV로 유튜브를 시청할 이를 위한 상품을 기획했다면? 물론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프레임워크를 말하는 것뿐이니 이해해주세요.
보통 근데 이런 아이디어 상품은 오래 된 브랜드사 기업의 전략에서는 잘 나오질 않는 것 같습니다. 앞선 기획 프로세스가 오래 굳어진 것도 있을 테고, 기존 도소매점 채널의 상품분류(진열)/유통 방식도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대형 오프라인 매장의 헤어 코너에 가면 젤, 왁스, 샴푸, 린스 같은 예상 가능한 카테고리로 분류돼 있지 ‘머리 뜨는 것을 방지해주는 약’ 같은 분류는 좀처럼 찾기 힘들기 때문에 기존 유통채널 프레임으로 사고하면 소비자가 진정 원하는 행동에 맞는 아이디어 상품을 떠올리기 힘든 건 당연합니다. 반대로 아이디어 상품 역시 이러한 채널에서 대형 브랜드를 비집고 들어가 자릴 차지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그에 맞는 ‘파괴적 채널’, 새로운 마케팅 방식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1편은 이만 마무리하려 합니다. 이쯤 읽으면 D2C는 단순히 디지털 마케팅 기법만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컨설팅을 의뢰하는 분 열이면 일곱분께서 이를 페이스북 마케팅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신데요. D2C는 파편화되어 제각각 발전한 미디어가 만든 신유통 방식이고, 여기서 큰 성장은 파괴적 제품 없이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직 100% 생각을 정리하고 쓴 글은 아니라 내용적 결여가 있습니다만 우선 남기고 싶었습니다. 조금이나마 더 명쾌하고 분명히 세상을 이해하는 날을 그리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jango.djaang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