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커리어 패스, 마케팅 커리어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 생각.
나는 일을 언론홍보PR일로 시작했다. 전공과 무관한 직업이었지만 훌륭한 멘토들 사이에서 직무의 전문성은 물론이고, 일을 대하는 정직한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연락을 자주 주고 받고, 서먹해져 하지 못하는 관계도 있지만, 우연히 지금 그때 내가 보낸 낯 뜨거운 메일과 그에 보이는 건방진 태도를 보면 내게 여러 시간을 베풀어 주신 모든 선배들에 대한 감사함이 사묻힌다.
회사는 전반적으로 어리고 자유로웠던 분위기였지만, 언론홍보 부서는 회사 목소리를 대표하는 만큼 행동에 무게를 요했고 다양한 언론의 종사자와 이해관계인과 잦은 만남을 가져야 했기에 친화적이면서도, 네트워크 파워를 요했다. 어찌됐건 부족한 난 밥값은 해야 한다는 맘으로 PR에 관해 써내려간 전문서적을 많이 읽었다. 전략과 보도자료를 쓰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대여섯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건 이러한 이론이 실제로 일이 성사되는 과정에서, 쓰인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돈 버는 방법은 안 가르쳐주는 것처럼 기사를 많이 나오게끔 하는 가장 효과적인 현실적 방법이 잘 나와있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가장 현실에 가깝다 생각한 방법은 미팅을 많이 하는 것이었다. 술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많이 먹고 마주보면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정보원과 기자 간의 유착관계가 생길 수 밖에 없고 호재든, 악재든 내기 쉽고, 막기 쉬워진다.
이런 건 인간관계에 큰 문제를 겪지 않고 살아 온 나에겐 꽤 어렵지 않은 문제였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PR의 본질이라면? 전문성을 가질 수 있는 직무일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많이 만나는 횟수에 비례해 성과가 나올 수만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에 탁월함을 갖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생계와 엮여 있다면 탁월함이 없다한들 정말 히스테리만 없다면 못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일을 이렇게 정의해버리면 못할 사람이 없는 사소한 직업이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럼 이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위기관리였다. 앞선 생각의 출발이 잘못됐다. 선배들이 미팅을 많이 잡는 이유는 기사를 많이 내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 결국은 기업 리스크가 터졌을 때 막기 위한 보험을 들어두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PR 부서는 위기가 갖는 특성에 대해 연구하는 조직이 될 수 밖에 없다. 기업이 겪는 위기가 얼마나 많은가? 노조 문제부터, 사내 문화, 임금체불, 이익 하락, CEO 리스크 등 결국 이런 위기를 카테고라이즈 해 뜯어보다 보면 '사회'란 것이 나온다. 사회적 시각을 견지하지 못하면 위기를 엉뚱하게 정의하고 대중과 괴리감 큰 대변인 노릇과 참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를 많이 알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주요 사회현상에 대한 주관적 의견을 갖는 거부터 시작한다. 의견을 가지면 다른 이의 의견도 보일 거고 그에 부딪히고 화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화가 나는 이유를 들여다 보면, 상대방의 시각에서 우리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난 PR 전문가는 아니므로 이런 이야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은, 업의 본질이란 어떤 것을 딱 깠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결과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이어서 하고 싶은 주제인데 커리어의 이동에 있어 본질은 연봉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회사에서 8년 간 PR과 디지털 마케팅으로 업력을 쌓은 뒤 생각이 많아졌다. 마케팅 부서로 옮긴 건 조금 더 돈을 버는 행위에 가까운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2015년 때는 (지금도 업계 전반의 분위기를 잘 알진 못하지만) 마케터의 역량이라는 것이 예산의 크기에 맞춰진 느낌이었다. "쟤는 어떤 종합대행사랑 000억 굴려본 사람이래", "쟤가 지금 이번 신차 광고 기획했대" 같은 평가와 이후 결과 보고서의 완결성과 길이로 능력이 재단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돈을 버는 행위를 보려고 왔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결국 마케터가 하는 일은 기획과 조율에 가까웠다. 예산을 만들고, 기획하고, 나머지 돌아가는 일은 에이전시와 그로 인해 만들어 진 알 수 없는 컨소시움을 통해 만들어졌다. 맨날 엑셀 파일을 보고 받고, 그 안에서 지표가 튀거나 떨어지면 워닝을 주고, 예산 얼로케이션을 다시 하고. TV를 00억에 틀고. 잘 나왔을 경우 지표를 신나게 넣어 보고서를 잘 썼다. 이게 절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진짜 강한 마케터라면 극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시장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이런 일을 오래 하면 내가 그런 능력이 생길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이직을 결심했는데 그때 내가 다음으로 가져 가고픈 일의 주제는 하루 하루 정량적 성과를 볼 수 있는 마케팅을 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그때 그건 퍼포먼스 마케팅이란 이름으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고, 그것의 끝은 조사해본 결과 커머스 업계, 조금 더 좁게는 페이스북 마케팅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당시 위메프, 티몬, 쿠팡 같은 이직 대상 업체가 있었지만 나처럼 PR 6년에 마케팅 2년 정도 한 사람을 마케팅 매니저나 과장급으로 데려갈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향지원은 선택이 아니라 반강제적 상황이었는데 이전부터 눈여겨 봤고 지인까지 있던 블랭크티비가 딱 제격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내 생각은 이후 들어맞았다. 잘 안 됐더라도 후회는 크게 없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부분의 기술을 과정에서 배웠으니 말이다.
그 이후로 6년이 지난 지금 직업으로 마케팅 업의 방점은 에이전시에서 직접 실행하는 마케터로 바뀌었다. 00억 써봤다는 말보다 어떤 툴을 쓸 수 있고, 지표를 얼마나 잘 읽어내 즉각적으로 직접 혹은 팀을 시켜 대처할 수 있고 같은 능력이 존중 받는 시대가 됐다. 참으로 맘에 드는 분위기다. 이직처를 결정하기 전으로 돌아가 돈을 조금 더 많이 주는, 조금 더 이름이 알려진 큰 커머스로 이직을 결심헀다면, 지금 아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으로 장담한다. SNS 광고로 돈을 버는 행위가 이렇다 저렇다 좋지 않은 말도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속을 다 알고 까는 거랑 모르고 까는 거랑은 수준차이가 많이 난다. 그럼 이제 마케팅 커리어의 넥스트는 뭘까? 어떤 아젠다를 잡아 보면 좋을까?
나외 비슷한 성장과정을 거친 이 혹은 과도기를 겪는 90년생쯤의 마케터가 성장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를 물어본다면. 현재 본인 경제/생계상황이 너무 힘든 상황이 아니라면 무언가를 만들어 보는 행위에 직업으로든, 취미로든 집중해보길 바란다고 이야기하겠다. 0->1을 이해하는 건 사업가만 할 수 있다. 내 기준에서 많이 보이는 글에서(혹은 내가 썼던 과거글을 보면 내가) 마케터가 1->3, 1->10쯤을 해두고 뻑가는 걸 했다고 도취되는 것 같다. 정기 구독 서비스든, 블로그든, 브이로그든, 공예 활동이든, 스스든 무언가 자기만의 관점으로 만들어 구독자 10명, 100명, 1000명을 만들어 보는 사건을 겪는 건 0->1을 만들어 본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내가 알지 못한 소비자의 관점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소비재든, 서비스든 내가 이렇게 하면 팔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솔직히 말하면 어마어마한 데이터 분석툴이 그리 필요하지 않다. 직관 + 정량적 사고다. 앞서서 그보다 메타인지(자기를 잘 아는 것)와 행동, 실천력이 더 크다.
난 크리에이터를 동경한다. 좋은 학벌, 직장, 배경 없이도 세상을 캔버스로 이해하고 자기 관점을 철철 묻혀 확실한 메시지로 확실한 소수를 이끄는 사람들. 지금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훌륭한 브랜드는 초기에 소수가 향유했다. 이것이 경제적 상황이 아주 좋지 않은 상황만 아니라면, 이런 도전과 학습을 권유하는 나의 이유다. 그것이 또 하나의 진짜 마켓+잉 아닌가?
요즘에 나는 비주얼라이징을 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스스로 뽀샵과 일러를 배우는 건 아니고 이미지와 레퍼런스 리서치를 잘 하는 방법, 그것을 코어하게 정리하는 방법, 마지막으로 그것을 구현해 줄 아티스트에게 잘 설명해 내가 그리던 결과물을 수정을 거쳐 초기 생각과 똑같이 만드는 방법. 이미 그림실력으론 성공하기는 조금 늦었고 이런 감과 리서치 능력이라도 좋아야 한단 생각을 하며 다시 마케터로서의 다음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