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날이 좋아 산책에 나섰다. 한라산 위로는 짙은 회색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지만, 내가 T서 있는 이곳은 날이 개여 맑은 조각하늘이 보인다. 그래도 지열이 올라와 내딛는 발걸음은 다소 무겁다. 그럼에도 제주도의 습윤은 내 피부에는 적격이다. 육지의 건조한 날씨에서는 쫙쫙 갈라지던 내 피부, 특히 가려움증이 심했는데 점점 그런 증상이 사라진걸 보니.
집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길은 계속 내리막길이어서 걷기에는 수월하다. 마을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돌아 외진 길로 내려가다 보면 섬이지만 농촌스러운 맛도 느낄 수 있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무화과나무에서는 벌써부터 진한 열매 향기가 퍼지고, 무꽃이 즐비한 텃밭에는 나비 떼가 몰려들어 장관을 이룬다.
돌담 너머 밭 S 강사를 만난 건 2008년 겨울 무렵이었다. 대구출신인 그는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하고 있었다. 당시 본사에서는 출판시장이 악화되어 신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교육산업이었다. 말하자면 전집을 만들고 총판을 통한 획일적인 판매루트에서 벗어나, 본사에서 직접 고용한 강사를 통해 판매한 책을 교육하면 판매루트와 교육루트 이중의 구조로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을 수 있고 새로운 시장 또한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당시에 나는 지역국장으로 교육사업본부 강남지역을 총괄하고 있었다. 본사에서는 강사모집을 통해 강사들을 뽑아 연수한 뒤 각 지역에 투입하는 방식이었는데, 비정규직으로 선출된 강사들은 소속감이 없었고 본사의 취지와는 다르게 고객들의 클레임이 많아지자, 전일강사라는 타이틀로 1년의 수습기간을 거쳐 정규직으로 발탁하는 새로운 과정을 기획했는데 여기에 S 강사가 지원하게 된 것이다.
서울의 빌딩 숲 나는 2017년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시인협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전에 버켓리스트 중 하나가 작가가 되는 것이라 용기를 내어 가입하였다. 그전에 몇 편 적어 놓은 시를 올리게 되었는데 처음에 굉장히 긴장하였다. 그러나 내가 쓴 시와 카페에 올려져 있는 시인들의 시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게 되었고 여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몇 개월 흐지부지하며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자전거에 빠져 있어서 사실 자전거 타는 재미가 쏠쏠하던 때이기도 했다. 자전거 관련된 책을 사서 읽다가 미니벨로를 구입하면서 시간만 나면 제주도 해안도로를 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휘저우며 다니던 때였으니까.
본사에서 콘퍼런스가 있어 참석 차 본사 교육실에 들어설 때, S 강사를 처음 만났다. 말수가 없고 무뚝뚝한 표정에 안경 속으로는 조금은 날카로운 시선의 그가 어쭙잖게 인사를 했던 것이다. 나도 말로만 듣던 전일강사라서 호기심 반 기대반으로 그를 지켜본 것 같다. 몇 개월 뒤 본사에서 일하던 그는 강남지역의 전일강사로 발령이 났다. 다른 또 한 명의 전일강사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