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대화의 인지적 오류, 노랑
말하지 않을 노랑
‘놀아’라는 어감의 노랑은 마치 오월의 햇살 같아요. 밝고 따사로운 느낌을 주어 길거리 간판도 매장에 진열된 상품에서도 눈에 확 띄어 매혹적이지만, 노랑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돼요. 파랑, 보라, 흰색을 특히 검정을 좋아한다고 하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지만 ‘노랑’ 하면 마치 뉴트로 성향 검사처럼 내가 정형화되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되죠.
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마티스의 ‘삶의 기쁨’을, 누런 황토색의 억새를 그린 변시지 화백의 그림을 좋아해요. 모두 노랑의 표현이 재창조된 그림들이죠. ‘너랑’처럼 노랑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이 묻어 있어요. 지평선을 거닐며 환희의 순간에 생각나는 누군가를 표현하여 외로움은 극대화되죠.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노랑을 말하지 않을 거예요. 뫼르소처럼. 한낮의 태양이 너무 밝아 총을 쏘았다고 말할 거예요. 노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재판관과 법정 사람들처럼 노랑을 욕보이게 하면 안 되니까요. 색은 단순히 색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