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다큐에세이] 000_ Prelude 02 자발적 관심
Prelude 02_자발적 관심
2016년 코펜하겐에서의 봄, 처음으로 주어진 수많은 개인적 시간들을 어찌할 줄 몰라 매일 매일 시간이 남아 돌았던 나는 (이전화, Prelude_01 개인적시간) 시내의 한 카페 겸 바(bar)에서 바리스타로 봉사 활동을 했다.
이곳은 코펜하겐 대학과 연계돼 운영되는 비영리 카페로, 재학/교환 학생들의 자원 봉사로 근무가 이루어졌다. 낮에는 카페, 밤에는 바(bar)로 운영되고 2층에는 스터디룸까지 마련되어 있어 많은 학생들의 아지트로 애용되는 곳이었다. 근무는 한 달에 세 번 5시간씩만 하면 되었는데, 함께 근무하는 친구와 커피를 만들며 이야기 나누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날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30분 가량 기숙사에서 자전거를 타고 와 기분 좋게 문을 열고 카페로 들어섰다. 오늘 같이 근무하는 친구는 코펜하겐 대학에 재학 중인 남학생이었다.
지난 근무 때 한 번 마주쳤던 적이 있는 친구였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지만 철학과를 전공하는 이 친구는, 대화를 할 때 한 번도 정상적으로 문장을 끝마치는 법이 없었다. 덴마크인들 특유의 냉소적 농담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아이와 몇 마디 나누어보면 될 일이었다. 모든 말을 농담 같이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농담이 아닌, 어찌됐던 재미있는 아이였다.
우연히 저녁에 얘를 목격할 때면 항상 한 손에 맥줏잔을 들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다음날 카페에 나가보면 멀쩡히 앉아 오전부터 레포트를 쓰고 있는, 반전의 부지런한 아침형 인간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덴마크 학생들은 헤르미온느의 시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자기 시간을 쓴다)
근무할 때 나누는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하다. 교환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만나면 서로 간단한 자기 소개와 함께 전공을 물어보고, 얼마나 머무는지, 어디서 지내는지, 무슨 수업을 듣는지 등, 교환학생들끼리 주고받을 법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 날의 주제는 내가 듣던 수업이었다.
Sustainable Denmark
교환학생의 특권이 있다면 성적의 압박 없이 듣고 싶은 수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덴마크의 지속가능한 사회'에 온 관심을 쏟던 터라 이 "Sustainable Denmark"란 교양 수업을 전공보다 더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수업에선 주로 '일과 여가의 공존', '환경을 위한 지속 가능 발전'에 대해 다뤘다.
나는 이전날 강의에서 다룬 채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강의를 듣기 전까지 나와 내 친구들은 '지속가능한 환경'과 '채식'에 대한 연관성을 전혀 알지 못했고, 이에 지난 강의를 듣고 무척 놀랐으며, 코펜하겐에 있는 동안 함께 채식에 도전해보기로 했다고 이야기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그가 말했다.
"나도 채식주의자야."
그가 처음으로 장난끼 없이 뱉은, 완전한 문장이었다.
"너가??? "
우리나라로 따지면, 항상 치맥과 삼겹살&소주를 주식으로 삼고, 지하철 의자를 집 침대보다 자주 대면하는 삶과 전혀 이질감 없는 이미지의 그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채식주의자'라는 단어에 나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몇 년 동안 열심히 요가를 수련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경악스러운 것은 그가 뱉은 그 다음 문장이었다.
"내가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본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추천해줄게. 인간이 육식으로 얻는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 대한 영화야."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다큐멘터리"라는 단어와 그 단어를 그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꺼내는가, 였다.
그러니깐 그때까지 나에게 다큐멘터리란 '단 한 번도 내 스스로 본 적이 없는 것' 혹은 '주로 은퇴한 50,60대가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디서 이런 이미지가 형성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큐멘터리를 떠올리면 어릴 적 처음으로 '죽음'이란 개념을 마주할 때 받았던 느낌과 비슷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숨이 콱 막혀오는 무언가. 두렵고, 어두운 이미지.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는 늘 그랬다.
그런데 방금 이 아이가 내뱉은 단어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자연스럽고, 방금 내가 이야기했던 내 관심사들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으며, 반짝반짝 빛이나고 있는 단어였다.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이 반짝 반짝 빛나는 광채의 출처가 곧 나의 호기심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자발적 관심
이라는 것도.
일생동안 훈련을 받아와서 그런지, 이곳의 학생들은 따로 이런 능동적 유전자를 따로 갖고 태어난 마냥 본인의 시간을 잘 다룬다. 어릴적부터 개인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많았을 뿐더러 그 시간을 운영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도 함께 자랐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에 반해 나는, 일생의 행복한 삶이라 여겼던 것을 이곳에 와 3달만에 고갈시킬 정도로 내 개인적 시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여때까지 '개인적 시간'이란 개념을 일상 속에서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휴식'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휴식'이란 언제 가능한지 모르는 불확실한 무언가, 때문에 찾아왔을 때 어떻게든 최대치를 뽑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무언가였다. 여기서 휴식 외의 '개인적 시간'이라는 개념은 없다. 개인적 시간이 곧 휴식 시간이고, 휴식 시간이 곧 개인적 시간이다.
하지만 휴식을 매일 매일 내 일상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걸 다 하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그 때부터 휴식의 개념은 개인적 시간의 개념 안에 포함된 일부일 뿐, 휴식 외에도 개인적 시간이란 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되었을 때 이 다음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관심의 문제로 남는다.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와서, 이때까지 난 왜 단 한번도 내 스스로 다큐멘터리를 클릭해보지 않았는가의 문제를 두고 나는 이것이 시간과 관심의 문제와 맞닿아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는 마당에 한 가지 소재에 대한 정보 전달식 영상을 1시간 반 가량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에게는 어떻게해서든지 이틀만에 드라마를 1회부터 16회까지 정주행할 초인적 시간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짧은 휴식의 시간동안 '최대의 쾌락'을 이끌어내어 '잘 쉬었다'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관심사는 여기에 있다. 이런 것을 하고 난 다음의 시간이 주어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휴식 외의 개인적 시간이 바탕을 이루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오랫동안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발적인 관심을 키워나가게 된다.
이 관심의 끝에 있는 것이 바로 '다큐멘터리'었음을 나는 그가 추천해준 다큐멘터리 영상을 클릭하는 순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다큐멘터리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