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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말랑 Dec 12. 2019

내 이상형은 ‘고기 잘 굽는 남자’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새내기 여학생 넷이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될까? 지금 서로의 이상형을 말해두고 나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비교해 보면 재밌겠다. 그치.” 친구들은 핑크빛 상상을 하며 자신의 이상형을 고백했다. 친구 1호는 보라색 츄리닝이 어울리는 남자라고 했다. 좋아하는 체육 선생님이 늘 보라색 츄리닝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우리는 순수했다.) 친구 2호는 도서관을 좋아하는 남자, 친구 3호는 달리기를 잘하는 남자라고 했다. 그때 내가 얘기했던 내 이상형은 ‘고기 잘 굽는 남자’였다. 그리고 이상형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직장동료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살려 달라고 했다. 친구 소개팅을 주선했는데 펑크가 났다며 대신 좀 나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갈비집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맛있는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고 다녀와 줘. 돈 많은 남자야. 아마도 소고기 사 줄 거야. 너 고기 좋아하잖아. 그렇게 소개팅남 1호와 ‘풍년갈비’에서 만났다. 남자 1호는 나에게 묻지도 않고 이 집은 곱창이 맛있다며 갑자기 곱창을 시켰다. 난 곱창 못 먹는데 말이다. 곱창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는 나를 본 건지 만 건지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3인분을 다 먹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남자 1호는 식당에서 받은 영수증을 갈기갈기 찢더니 식당 앞 화단에 휙 버렸다. 기대를 하고 나온 자리는 아니었지만 이 장면을 보면서 삐익 빨간 버튼을 눌렀다. 공중도덕 의식 부족 탈락!


소개팅남 2호는 소개팅하는 날 새로 산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어떻게 알았냐고? 새 옷을 반듯하게 접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첫 번째 만남에는 흰색 티셔츠를 입고 오더니 두 번째 만남에서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왔다. 같은 브랜드에서 줄줄이 놓여 있는 티셔츠를 색깔만 달리해서 사놓은 게 분명했다. 뭐 감각이 없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옷 입는 정도는 내가 골라주고 잡아주면 될 일이었다. 남자 2호는 차를 운전하는 게 싫다며 버스를 타고 나왔다. 처음 만난 날, 맛있는 떡볶이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한껏 멋을 낸다고 8cm짜리 구두를 신고 갔는데 하필 떡볶이집은 모란고개 너머에 있었다. 30분 넘게 또각또각 걷고 걸었다. 떡볶이 맛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발이 아팠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좋아하는 백숙집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갔다. 또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플랫슈즈를 신고 갔다. 와아. 걸어서 금방이라며 출발했는데 백숙집은 남한산성 너머에 있었다. 춥고 다리 아프고 배고팠다. 눈치 제로 배려심 제로 탈락!


소개팅남 3호는 너무 들이대서 탈락! 소개팅남 4호는  재미없는 자기 얘기만 해서 탈락! 소개팅남 5호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서 탈락! … 물론, 내가 거절당한 소개팅도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내가 거절당했는지 확인해볼 길이 없으므로 내가 거절한 소개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내가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을 세어 보다가 알게 됐다. 이상형은 상대방에게 반하는 단 하나의 조건이 아니다. 내 이상형은 ‘고기 잘 굽는 남자’라고 말하면서 정작 ‘고기를 잘 못 구워서 싫은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고기’만’ 잘 구우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조건 모두 만족하고 고기’도’ 잘 굽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고기 잘 굽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내 이상형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던 이유도 이젠 알 것 같다. 사람들의 이상형을 들어 보면 쉽고 단순하다. 눈이 높은 것도 아닌데 이상형을 못 찾는 게 이상하다며 갸우뚱한다. 우리가 이상형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이상형의 기준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조건들을 모두 통과한 사람들 중에 이상형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형은

모든 게 만족스러운 사람에게서

가장 마지막에 발견되는 아주 작은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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