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 방문기
빵집은 지뢰밭이다. 아무리 천천히 돌아도 1분도 걸리지 않는 작은 동네 빵집인데 아이들이 사고를 치기에는 넓디 넓은 운동장 같다. 케이크 진열대에 놓인 뽀로로와 타요 앞에서 아이들은 열광한다. 열심히 닦아 놓았을 냉장고 유리에 손자국이 날까 봐 신경이 쓰인다. 유리는 만지면 안 돼. 여기서 보기만 해야 해. 발로 아이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어가며 단단히 일러 둔다. 아이들이 빵 사이사이를 지나 나를 따라다닐 때면 빵 소쿠리를 슬쩍 스쳐 통째로 엎을까 봐 조바심이 난다. 빵집에서 동선을 잘못 짜는 날에는 뽀로로 빵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그저 봉지에 뽀로로가 그려져 있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온 몸으로 뽀로로 빵을 사고 싶다고 말하며 그 앞을 떠나지 못한다. 빵집에 가면 눈으로는 아이들을 쫓으면서 손으로는 부지런히 빵을 골라 최대한 빨리 나와야 한다.
자주 가던 동네 빵집에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왔다. 그런데 주니지니와 함께 빵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르바이트생은 아이들을 미워했다. 포장하던 빵들을 옆으로 치우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아이들만 쳐다봤다. 빵집에 들를 때마다 조심해야 한다고 워낙에 주의를 줘서 주니지니도 빵집에서는 발걸음까지 조심조심 걷는다. 게다가 그 날은 주니지니가 케이크 진열대에 매달리지도 않았고 내 옷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안 그래도 빵집에 가면 아이들의 작은 행동까지도 유난히 신경 쓰였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아이들을 계속 째려보며 집중하고 있으니 그 눈빛까지 살피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급기야 주니지니를 빵집 벽에 붙여 세워 두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내가 말한대로 입도 뻥긋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눈으로만 빵집을 좌우로 살폈다. 지금도 그 때의 두리번거림을 생각하면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다.
아르바이트생은 아예 팔짱을 낀 채 두 다리를 벌려서서 아이들을 집중 감시했다. 감시할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벌받는 것처럼 빵집 벽에 붙어 가만히 있었으니까. 몹시 불편했다. 그냥 참고 넘어갈 수 없어 빵을 고르다 말고 계산대로 갔다. 지금 아이들을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 거예요? 아이들이 뭔가를 잘못했나요? 아이들을 감시하던 표정 그대로 눈동자만 굴려 나를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쳐다본 거 아닌데요. 하고서는 또 아이들에게 레이저를 쐈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상황이라 더 이상 대꾸는 하지 않았다. 삼 초 동안 아르바이트생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꾹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빵을 사지 않고 그대로 나오고 싶었지만 골라 놓은 빵이라 어쩔 수 없이 계산하고 나왔다. 내가 다신 여기 오나 봐라! 동네 빵집에서 손님 하나 잃는 것 쯤이야 아무것도 아닐텐데 나는 마치 대단한 복수라도 하듯이 결심했다.
아이가 웃고 울고 달리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인데 왜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일이 됐을까. 이 세상을 노키즈존과 웰컴키즈존으로 나눠서 아이들을 사람들 속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법과 그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들을 어디서 배워야 할까. 어쩌다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명랑한 아이들이 이토록 부담스러운 존재가 됐을까. 내가 이모가 되기 전, 나 또한 그랬다. 카페에 앉아 있을 때면 아이를 데리고 오는 엄마들이 짜증이 났다. 내 옆자리에 앉지 않길 바라며 눈치를 보고 가까운 자리에 아이들이 앉으면 슬금슬금 짐을 챙겨 다른 자리로 옮겼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눈치를 보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작아졌다. 기껏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나를 만나게 됐다. 아이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예절과 바른 자세를 가르쳤다. 안간힘을 쓰는 데도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주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고 가끔은 아이들이 막무가내로 드러누워 난감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도 환장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며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은 더 큰 스트레스가 됐다.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어 놓고 아이 똥기저귀를 동그랗게 말아 밥사발에 두고 나가는 엄마 이야기가 떠들썩 하게 기사로 뜨는 시대지만, 그렇지 않은 엄마들도 그만큼 많다는 것을 내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그러니 적어도 보호자가 동동거리면서 아이의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면,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잠시만 그 상황을 지켜봐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
아이와 함께한 외출에서 이모는 성장한다. 모르는 아이가 울고 있으면 달래는 시늉을 하며 미소를 건넬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낯선 환경에 긴장한 아이에게도 안녕! 하며 손을 흔들 수 있는 따뜻함이 자란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도 내 의자를 쿵쿵 발로 차는 뒷자리 꼬마에게 화가 나기 보다는 과자라도 건네어서 따분한 시간을 즐겁게 해 주고 싶다. 그런 아이 옆에서 쩔쩔매는 엄마의 난감함이 헤아려지는 까닭이다. 이런 마음들이 모여 점점 아이들이 살기 좋은 동네가 만들어지는 거겠지. 노키즈존과 웰컴키즈존이 나뉘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지내고 싶다.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 속에서도, 큰 어르신들의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따뜻한 마음 하나를 아이 손을 잡고 나선 길에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