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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Dec 11. 2020

택시, 미용실, 그리고 이삿짐센터

돈 낸 값을 하는 것들


코로나 와중에도 겉으로는 평화로운 이곳에 살며, 요즘은 혹시 먼 훗날 이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 내가 그리워 할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그중 아마 가장 그리울 것은 상향 평준화된 서비스의 질일 것이다. 뉴욕처럼 바가지를 쓴 것 같은데 거기다 팁까지 얹어줘야 하는 점도 없고, 런던처럼 서비스의 질이 복불복이지도 않다. 당연히 평균 이하인 곳들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도쿄에서 내가 겪어본 모든 서비스업은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한다는 것. 때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것. 그것이 도쿄 생활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인 것 같다. 




작년 여름, 서울에서 혼자 택시를 탈일이 있었다. 사거리에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불렀는데, 각각 다른 방향의 두대가 내 손짓을 보고 앞으로 왔다. 뒤차에게는 죄송하게 됐지만 난 그래도 먼저 도착한 택시를 탔고,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간발의 차로 손님을 놓친 뒤차의 아저씨가 내가 탄 택시를 추격하며 창문을 열고 고래고래 쌍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놀라 눈을 마주치기도 무서워 다른 쪽을 보고 있었는데, 내가 탄 차의 운전사 아저씨도 질세라 맞은편 창문을 열고 쌍욕으로 답을 하기 시작했다. 내 손님을 네가 뺏었네, 그런 게 어딨냐 같은 자영업자끼리 선착순이지 이놈아, 등등으로 시작된 싸움은 점차 서로의 조상까지 짐승으로 만들며 걷잡을 수 없이 추악해졌다. 압구정동에서 시작한 갈등은, 삼성동을 지날 무렵 신호에 걸린 뒤차 아저씨 때문에 우연히 끝이 났다. 그나마 조금은 더 점잖던 내가 탄 차의 운전사 아저씨는 나에게 사과를 하셨다. 하지만 도착지에 내린 후에도 심장이 아직도 벌렁거리던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 


일본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소심한 일본인들은 갈등을 두려워한다. 나의 손짓을 보고 달려온 택시 두대가 일본인 운전사였다면, (속으로 상대방 욕은 할지언정) 서로 "도-조, 도-조" (どうぞ:양보하거나 뭔가를 상대방에게 권할 때 하는 말. 영어의 please와 비슷하다)하며 눈치를 보며 양보하다 두대 중에 한대가 마지못해 손님을 태우는 척했을 것이다. 또한, 일본 택시의 가장 큰 장점은 확실하게 대접받는다는 느낌 이외에도 택시와 손님 사이에 그어져 있는 넘을 수 없는 선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손님이 있는데 창문을 열고 상대편 운전자에게 욕을 한다? 일본인 택시기사에겐 그보다 체면을 구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택시를 탔을 때, 운전사가 휴대폰으로 전화하는 것도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항상 깨끗하게 정돈된 실내며, 대부분이 신사적인 운전기사의 태도 (아이들과 탔을 때 가끔 불쾌한 운전기사들도 있는데 '말없이 표정이 안 좋다' 정도이다), 문을 만지지 않아도 자동으로 열리고 닫히는 점, 팁을 주지 않아도 되는 점 등 어찌 보면 소비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들인 것 같지만 런던을 제외한 다른 도시의 택시들에서는 거의 보기 불가능한 레벨의 일관성 있는 퀄리티다. 


런던에도 전문적이면서도 인간미 있는 블랙캡이 있지만, 가격 대비 서비스의 평균적인 질로는 도쿄의 택시를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관찰이다.

최근에는 심지어 블랙캡 시설과 비슷하게 업그레이드되어 편리함까지 갖췄다


아이의 같은 학교(유치원) 학부모 중에 일본에 산지 30년이 넘은 나이 많은 호주인이 있는데, 80년대 일본이라는 나라에 이사를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미용실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도쿄의 미용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상향 평준화된 일관됨으로 고객을 대한다는 것에 나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아시아 다른 나라들에서는 많이들 벤치마킹해서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양 국가 출신의 사람들에게는 완전 신세계를 경험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청담동 미용실들이 k뷰티로 스타일링을 앞서가긴 하지만 고객을 대하는 서비스의 레벨로 도쿄 미용실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원장이건 스타일리스트 건 항상 일관된 정성, 겸손, 상냥함으로 고객을 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미용실은 내가 예약한 그 시간에 직원이 정말 나 하나를 서브하기 위해 그 시간을 비워 놓은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분위기를 위해 디테일에도 엄청 공을 들이는데, 단적인 예로, 내가 가본 도쿄의 모든 미용실들은 크고 작고를 떠나 바닥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거의 없다. 고객 앞에 놓인 거울/선반에는 광고나 판매하는 제품 등이 없고 깔끔하게 머리 영양제, 손소독제, 음료 정도 있다. 한 고객을 정성스레 접대(?)하고 난 후에는 무조건 모든 가위를 한 번씩 다 닦는다. 샴푸를 하는 곳도 항상 엄청 깨끗하고 스파에 온 기분마저 느낄 수 있다. 어찌 보면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은 '머리 손질하는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기에 다른 부가적인 것들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일본에서는 '미용실에서 대접받는 시간에 대한 비용'이기 때문에 전반적인 경험이 중요시되어 비용이 덜 아까운 것 같다. 5성급 호텔과 비슷한 서비스를 받고 나면 청담동과 비교해도 더 싸게 느껴진다. 


첫째 아이가 3살 반 때부터 다니는 동네의 아주 작은 미용실. 미리 아이용 동화책도 항상 준비해 놓고, 매년 연하장도 직접 디자인해서 보내주신다.





우리는 결혼 후 8년간 3번의 이사를 했다. 서울 신혼집에서 런던으로 국제이사, 런던에서 도쿄의 첫 집으로 국제이사, 지유가오카의 집에서 지금의 집으로 국내 이사. 도쿄에서의 이사가 처음이자 마지막 국내 이사였다. 우리가 이삿짐센터를 알아보자, 서비스비가 비싼 일본이기에 주변 일본인 친구들이 스스로 짐을 싸라고 조언을 해줬다. 


'4인 가족 짐을 직접 싼다고?' 처음엔 그 말에 너무 놀랐지만 비용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인건비가 비싼 일본이라 해도 국내 이사인데 국제이사 비용에 맞먹거나 능가하는 비용이었다. 3월 이사철에는 80제곱미터 살던 3인 가족이 50만 엔 정도까지 지불한 집도 봤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둘에 가구와 가전을 포함한 이삿짐 포장에 도저히 자신이 없던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비싼 비용을 지불하여 포장이사를 신청했다. 


그러나 이틀에 걸쳐 이삿짐센터가 오고 난 뒤,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은 극도로 공손한 아줌마 직원 두 명이 와서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온종일 포장만 했다. 둘째 날 오전 옮기기 시작하는데, 직원들의 서비스와 태도, 그리고 일의 완성도가 정말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바로 이것이다. 도쿄에서 비싼 비용을 내고도 돈낸값을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고객을 대하는 태도와 깔끔한 완성도. 서비스 업자와 고객과의 일정한 거리. 어찌 보면 인간미 느껴지지 않는 로봇 같기는 하지만 이 장점들이 지불하는 사람과 지불받는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불쾌함을 최대한 줄인다. 


나는 사실 흔히들 말하는 '프로불편러'스러운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살면서 고객 응대 또는 서비스에 있어서 바가지를 쓴 것 같다던지, 불쾌하다던지 그런 부정적인 기분을 당연히 많이 느껴보았다. 아마도 미국에서 제일 많이 느꼈던 거 같고, 그다음이 한국과 영국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살며 그런 기분을 느껴본 게 언제인가 생각이 별로 안 날 정도로 이곳에서는 웬만해서는 고객이 왕이다. 따라서 고객이 '프로불편러'일지라도 별로 불편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처음 도쿄에 와서 적응하느라 너무 힘들어했던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오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이 곳을 떠나게 된다면 여러 가지가 많이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그중 단연 제일 그리울 것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이런 확실한 서비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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