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불편해야 모두가 편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 인간이 살아가려면 이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를 가기 위해, 학교를 가기 위해, 마트에 가기 위해, 약속에 가기 위해 무조건 어디론가 이동을 해야만 한다. 어떻게 이동하느냐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도쿄에 살기 전까지 이 정도로 심도 있게 고민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도쿄 내에서의 이동 수단은 다음과 같다:
걷기 (무료, 몸이 힘듦)
자전거 (자전거 자체에 들어가는 비용, 보험비, 점검비, 배터리 충전 전기비, 몸이 조금 힘듦)
버스, 전철 (대중교통비, 출퇴근 시간은 번잡함, 몸이 조금 힘듦)
택시 (비싼 택시비, 잘 안 잡힐 때가 있음, 몸이 비교적 편함)
자가용 (자동차 자체에 들어가는 비용, 보험비, 주유비, 주차비, 점검비, 몸이 비교적 편함)
도쿄에서 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인증된 주차자리를 확보했다는 점.
그 주차자리를 위해 매달 3-8만 엔 정도의 주차비를 지불하고 있거나, 분양받았다는 점 (지역에 따라 많게는 차 한 대 자리에 700-천만 엔)
아니면 주차자리가 딸린 단독주택에 산다는 점.
2-3년마다 15-20만 엔 정도 되는 점검을 의무적으로 받는다는 점.
매달 비싼 세금과 보험료를 지불한다는 점.
어디든 차를 몰고 가서 주차할 때마다 비싼 주차비를 지불한다는 점.
굉장히 많은 것을 은연중에 티를 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돈과 시간이다. 너무 비싸다 보니 나는 가끔 원화와 헷갈리기도 한다. 0을 하나 더 써야 한국돈과 비슷한 금액이 된다. 이처럼, 자동차 자체에 들어가는 것 외에도 무지막지한 비용을 매달, 매년 지불해야 하며, 자동차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 써야 할 일이 엄청 많아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차를 사기 전,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차를 소유한다는 것과 동시에 굉장히 큰 책임감이 부여된다. 그래도 아이들이 어려서 이동에 제한이 많기 때문에 차가 없는 불편함 vs 차가 있는 불편함 중에 고민하다가, 일단 지금은 차가 없는 불편함 쪽이 더 크다고 판단해서 결국 차를 샀다.
차를 사는 것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차자리 확보이다. 우리는 아주 다행히도 만숀에 지하주차장이 딸려있는데 당연히 월세에 얹혀 한국돈 몇십만 원의 주차비를 매달 내야 한다. 주변에 엄청 럭셔리한 맨션에 사는 일본인 친구가 있는데, 주차장이 딸려있지 않아서 차를 살까 말까 5년째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 정도로 주차 자리는 한국의 아파트들처럼 디폴트가 아니다. 있더라도 대형 단지의 경우 대부분이 차고지를 세대수의 20% 이하로만 만든다고 한다. 물론, 무조건 유료 주차고 대부분이 엄청 좁다.
부동산 관리 회사에 차고지 증명서를 부탁했더니 대략 1주일쯤 걸려서 서류 하나를 발급해줬다. 차고지의 주소, 사이즈 등이 적힌 서류이다. 그 서류를 자동차 딜러에게 줬더니, 딜러가 나머지 업무를 대행해주긴 했다. 그래도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 차 딜러는, 그 서류를 갖고 우리 집 근처 경찰서에 가서 이 차고지가 정말 우리가 쓸만한 차고지인지 (이를테면, 집에서 반경 2킬로 이내, 우리가 구매하려고 하는 차종에 맞는 사이즈 인지 등등)를 판단하여 차고지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다음에 딜러가 그 차고지 증명서를 갖고 차량등록사업소에 가야 비로소 우리 차 등록을 할 수 있다.
결혼 전 뉴욕에 살았을 때도 주변에 차가 있는 지인들은 500불 이상 주차비를 내거나, 땅이 넓은 뉴저지나 근방 다른 지역 친척집에 주차를 해놓고는 했었다. 하지만 도쿄는 애초에 내가 사는 지역 반경 2킬로 이내에 차고지가 없으면 차를 살 수가 없다. 뉴욕처럼 잔머리를 굴려 주차비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차를 사는 게 먼저가 아니라 주차자리 확보가 항상 먼저기 때문이다.
차를 받기 전까지는 뭔 비용과 서류 작업이 이리 많은 건지 투덜투덜 댔었다. 심지어 여러 브랜드의 차를 구경했지만 차 자체의 가격도 동급 모델이 한국에 비해 항상 적게는 50만 엔에서 많게는 100만 엔 정도 더 비쌌다. 차를 받은 후에는 좁은 도로 때문에 투덜 대기 일쑤였다. 지인은 '만숀에 이렇게 넓은(?!!) 주차자리가 딸려있다니 운이 좋다'고 했지만, 새 차를 뽑은 지 이틀 만에 좁디좁은 주차자리 벽에 차문을 콕 찍어 페인트가 벗겨지는 불상사도 발생했다. 언제나 도착지에 주차장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고, 없으면 미리 근처 유료 주차장을 찾아서 가야 했다.
첫째 아이는 집에서 1.5킬로쯤 떨어진 스포츠 센터에서 1시간짜리 수영 레슨을 받는다. 아이와 걸어가면 20-25분, 자전거에 태워가면 10분 이내, 자동차로 이동하면 일방통행이 많아 빙글 뱅글 돌아 20분 정도 걸린다. (학원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식 주차장이 딸려있기는 하지만 차를 갖고 가면 매번 그 한 시간을 위해 440엔을 내야 한다. 심지어 자리도 4대밖에 없어서 한발 늦으면 근처 유료 주차장에 세워야 한다. 유료주차장은 20분에 200엔 정도인데 옷 갈아입히고 나오면 매번 800-1000엔 정도 나온다. 물론, 발레(valet) 파킹 아니고 직접 주차해야 하는 비용이고, 그래도 주택가라고 도쿄 내에서 싼 편에 속한다. 시내 번화가나 유명 관광지 주변은 20분에 400-500엔 정도 한다. 반면, 자전거 파킹은 무료여서 대부분의 부모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나 또한 비 오는 날 이외에는 가급적으로 운전을 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차가 있는데도 도착지에 유료 주차장이 없거나 주차비가 비쌀 때가 많아서 굳이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될 때는 그냥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타게 되었다. 이쯤 되면 서울의 중심지에서 몇 시간을 주차해도 25,000원밖에(?) 안 하는 신라호텔 발레파킹이 싸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나자, 이 불편함에서 오는 편함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불편하기에 모두가 편할 수 있는 것이다.
갓길에 패럴렐 파킹 되어있거나 대기하고 있는 차가 거의 없다는 점. 한국처럼 꽉 정체된 교통체증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점. 주변 차량의 빵빵 경적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점. 주차대란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점이 차로 이동할 때의 편의를 항상 보장한다.
도시에서는 누군가가 편리하게 생활을 하면, 다른 누군가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모두가 편하다면 그건 진정 편한 게 아니다. 내가 쉽게 차를 소유할 수 있으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쉽게 차를 소유할 수 있을 거고 그만큼 주차대란, 교통체증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반면, 모두가 어느 정도 불편해야 차를 소유할 수 있다면 차를 사기 전에 두세 번 더 생각하게 되고, 주차대란과 교통체증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방과 후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 자전거로 갈지 차로 갈지 고민을 하고 있다.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아이들이 친구들과 학교 앞 공원에서 몇 시간씩 놀기 때문이다. 당연히 논 시간에 비례해서 주차비가 책정된다. 어디론가 이동을 할 때마다 이렇게 전략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고민 끝에, 내가 차를 가지고 나가지 않는다면 도쿄의 도로에는 차 하나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운전자들의 교통체증이 줄어들 것이다. 그 말은, 나의 불편함이 다른 누군가의 편함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