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10월은 도쿄의 사립학교 입학을 위한 입시 준비의 달이다. 매년 11월 1일 또는 2일에 일괄적으로 사립학교 또는 국립학교들의 쥬켕(受験 수험: 입시 시험)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일본에는 에스컬레이터 학교들이 있는데,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 입학을 하면 해당 기관의 고등 교육기관까지 자동 진학되는 시스템이다. 모든 학교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위상으로 봤을 때 연고대 수준은 되는 게이오 대학교 같은 유명 대학교도 부속 소학교(초등학교)가 있기 때문에, 그 초등학교 입학하면 별 어려움 없이 게이오 대학까지 진학할 수 있는 제도이다.
우리 아이들은 영어를 쓰는 외국인학교 유치원을 다니는데, 여기 와서 신기했던 점은 한국은 여건만 된다면 너도 나도 외국인학교나 국제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 분위기지만(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인들은 가족 분위기와 부모의 교육관에 따라 선호도가 나뉘기 때문에 국적이나 해외 체류 여부를 갖고 외국인학교 입학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외국인학교들에 비해서 외국인 비율이 월등히 높다. 처음엔 그게 의아했는데, 지내보니 자신들의 교육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은 의지가 한국에 비해 높아서인 것 같다.
아무튼 그렇기에, 이 외국인 학교 유치원을 졸업한 일본인 10명 중 3명 정도는 외국인학교가 아닌 일본 학교에 입학시키기를 원한다. 따라서 나는 가까이서 이들의 입시 준비 얘기를 듣고 관찰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1주일에 한번, 한 시간 정도 가던 쥬쿠(입시 학원)를 입시가 가까워지면 여름 방학 3일 심화 과정 같은 것도 추가로 간다. 학교마다 입시전형이 다른데, 어떤 데는 체육/체조도 보는 데가 있어서, 그거에 특화된 체조 전문 입시학원도 있다.
선행학습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였지만, 그래도 경험해보기 전에 판단하지 말자는 주의로 실제로 5살*이었던 아이를 데리고 입시 체험 레슨을 갔다. 체조는 체육학원에서 1시간 동안 단체 클래스 형식으로 진행됐고, 필기형/면접 체험 학습은 학원 내부의 교실에서 1:1 개인교습으로 1시간가량 진행되었다. 두 곳 모두, 보호자는 뒤에 앉아 대기하며 어떤 위주의 학습을 하는지, 입시의 내용은 무엇인지 관찰하는 것이었다.
두 곳 모두 체험을 끝낸 결과, 그동안 내가 "입시"와 "학습"에 대해 굉장히 편협한 시야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두 곳 모두 아이는 너무 즐거워하며 학습을 즐겼다. 체험이었다는 말에 징징대며 계속 다니고 싶다고 하는 아이를 보며 정말 당황스러웠다. 이처럼 참가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것이 입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은 채 그냥 즐기고 있었다. 물론 수험의 형식에 기반된 학습이었지만 4-5살* 아이들이 그것을 머리에 계속 생각하고 있을 리는 없다.
필기/면접 전형은 내가 상상했던 "선행을 해야지만 가능한 학습 능력 테스트"와는 다르게, 쉬운 아이큐 테스트류에 가까웠다. 올바르게 인사하는 법, 바로 앉는 법을 익히고, 글자를 읽고 쓰는 건 잘 못해도 된다 (이건 우리 아이가 히라가나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선생님이 고려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질문의 예를 들자면, 선생님이 곤충이 5종류 정도 그려진 종이를 주고 "무당벌레 옆에 빨간색 색연필로 세모를 5개 그리시오." "매미 옆에 파란색 색연필로 네모를 8개 그린 후, 절반으로 나누시오"라는 식으로 읽어주면, 지시에 따라 그리면 된다. 또, 여러 가지 사물이 나열된 그림을 보고, "다음 중 부엌에 어울리지 않는 사물은?" 뭐 그런 식의 상식 테스트. 그려진 패턴을 보고 다음 패턴을 예상하는 수학적 문제. 한마디로, 아이의 태도, 학습을 할 준비가 되었는지, 선생님 말에 집중은 잘하는지에 대한 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
레슨이 끝난 후, 우리 아이의 능력에 대한 피드백과, 아이가 지원하면 합격 가능성이 있는 학교들을 원장 선생님이 추천해준다. 막상 명문 학교 몇 군데를 추천받고 나니 "이거, 한번 해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미 입학 확정을 받아 진학하기로 해놓은 외국인학교의 초등학교가 정해져 있었고, 일본어로 모르는 면접관과 대면을 하거나 학부모 사이에 껴서 소통할 자신이 없어서 거의 바로 생각을 접긴 했지만... 내가 여기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었다면 정말해볼 만한 입시 과정이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입과정 같은 치열함이 아직 이 나이 때의 아이들에게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교적 무난한 입시 과정을 어릴 때 겪으면,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치열해지는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 입시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국과 비교를 하자면, 수능과 대입에만 집중되어있는 입시 열기를, 여러 개의 entry point로 나눈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 예를 들어, 와세다 대학에 가고 싶다면, 와세다 대학 부속 중학교 수험을 보거나, 부속 고등학교 수험을 보거나, 대학교 수험을 치르면 되는 거다. 와세다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다니다가 공부를 너무 잘해서 좀 더 욕심내서 도전해보고 싶다 하면 동경대 같은 더 들어가기 어려운 대학교의 수험을 치르면 되고, 그대로 와세다에 남고 싶으면 남아서 졸업할 수 있다. 이처럼, 모두가 나름 자기만의 입시 과정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원하는 소학교에 탈락을 하면, 중학교 때 또 기회가 있는 것도 장점이다.
실제로 주변에서 사립 소학교 쥬켕을 준비시키는 일본 엄마들은 아이가 크면서 공부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하고 싶어서 어릴 때 입시를 시키려 한다고 나에게 말했다. 어릴 때 하는 입시는 준비는 (엄마는 준비시키고 데리고 다니느라 힘들지언정) 아이가 그나마 덜 고생하기 때문이다.
6살(한국 나이 7세)인 우리 아이는 "숙제"나 "homework"라는 단어가 뭔지도 모르고 아마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 정도로 학교 끝나면 친구들과 맨날 자연에서 뛰놀고 유일하게 하는 사교육은 전부 체육 관련이다. 그나마 내가 한국인 엄마로서 내재되어있는 맹모 근성으로 이따금씩 문제집 한 장씩 풀게 해서 어느 정도의 수학은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에서는 유치원생의 선행학습이 벗어날 수 없는 덫이 된 것만 같다. 이미 5-6살*에 숙제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영어로 말을 유창하게 하기도 전에 글을 쓰는 아이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하도 그런 얘기를 들어서인지, 일본의 소학교 입시 쥬쿠를 체험하기 전에 나는 입시 준비가 엄청난 선행학습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외국인학교에 재학하며, 계속 외국인학교에 충분히 다닐 수 있는 상황인데도 굳이 입시학원을 보내면서 소학교 수험 준비를 시키는 엄마들이 이해가 안 갔었다.
'저렇게 어린애들을 뭔 입시 학원을 보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도쿄의 소학교 쥬켕은 아직 안 걸어도 되는 아이를 억지로 걷게 하는 한국식의 선행학습이 아니었다. 경쟁이 치열하기는 해도 그 공부량과 학습 내용이 아이의 나이에 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준비과정이 아이에게 고통스럽지가 않아 보였다. 심지어 수험이 뭔지 잘 모르고 즐기면서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도 주변에 있다. 그렇기에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10년도 더 남은 대학 수능을 앞두고 유치원 때부터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나무 타며 놀 시간 없이 초등학교 2-3학년 내용을 가르치는 학원을 다니는 서울의 많은 5-6살*들이 더 불쌍하지 않은가.
* 이 글의 모든 나이는 만 나이로 표기되었습니다.
한국 나이 7세: 5-6살
한국 나이 6세: 4-5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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